본문 바로가기

해외 여행,트레킹/해외(유럽)

알비노의 유럽여행 18~19일차( 2015년 10월 12일~13일)/독일 베르린 시내투어,유태인 박물관


하노버에서 베르린까지는 버스로 이동하기로 했다. 한국으로 이야기하면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탔다.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초겨울 날씨였다. 손이 시리고 날이 생각외로 춥다.


 



알비노의 유럽여행 18~19일차( 2015년 10월 12일~13일)/독일 베르린 시내투어,유태인 박물관

 

Hannover(하노버)의 조카집에서 하루 머물고 바로 베르린으로 출발을 했다. 베르린의 방문은 처음이 아니다.
수 십년전 항공사에 근무할때 베르린에 세번 다녀왔었는데 지금의 기억으로는 다른 것은 생각나지 않고 비행기 속과 베르린에서 맥주만 기절할 정도로 먹은 기억밖엔  없는 것 같다.

 

하노버에서 베르린까지는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티켓은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 터미널에 나갔다.
계절은 10월임에도 불구하고 손이 시릴 정도로 춥다.

버스안에는 전부 독일 사람이다. 동양인은 나 혼자 였었는데 그 사실이 수 십명이 타고 가는 이 버스안에서는 나를 좀 쑥스럽게 만들었다.

 

버스의 티켓 확인은 모바일 폰으로 한다. 티켓의 QR코드를 찍으니 예약상태가 확인된다.
편안한 시스템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노인들도 타고 ... 국내에서의 사용은 조금 불편할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앞으로 한국도 이렇게 되지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유럽의 나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에서의 버스 기사 앞 자리에 블랙박스가 있어 속도는 제한속도 이상을 내지 못한다.

교통 경찰관이 차를 세워 블랙박스내의 자료를 드려다 보면 운전의 상황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운전기사는 제한속도 이상을 내지 못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물론 벌금은 상상외로 많다. 기사들이 제일 무서워 하는 것 같았다.

 

베르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유태인 박물관' 이었다. 
세계대전 이후로 히틀러가 유대인들에게 저질은 수 많은 범죄!
하나 숨김없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우리가 사는 사회도 개인, 단체, 기업, 국가 모두가 과거에 자기가 저질은 잘못의 반성을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독일과 유대인의 역사와 비슷한 역사를 가진 한국의 식민지 시대에 관련해  아직까지 자기 잘못의 인정에 소홀하는 일본과 아주 대조가 된다.

 

자국민들에 대해 과거 선조들이 저질은 많은 잘못을 공개해 그 역사를 통해 현재를 보는 독일인의 솔직성과 진솔함이 피부에 와닿았다. 독일인의 저력이 이곳에 있었다.

 

베르린에서 관광은 시간이 별로 없고 여러가지 상세히 보지 못했다.
다음에는 자전거나 시내 투어버스를 이용해 다니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것 같다.
베르린에서 며칠 묵고 다시 독일의 작은 도시 Geinsheim( 게인즈 하임)으로 이동해서 하이델베르그 등 으로 돌아다니게 된다.
 

베르린 에서의 밤 전철역은 어쩜 갱영화의 한 장면 같은 으쓱한 느낌도 들었다.

독일 사람들만 몇몇이 있고 썰렁한 분위기의 장면.

암튼 통독 이후에 처음으로 밟아보는 독일의 베르린이다.

 

 

 

 

 

 


하노버에서 베르린으로의 이동은 버스로 했다. 버스표를 인터넷으로 예약을 했는데 프린트로 뽐아서 지갑에 넣고 티켓팅을 하는 분에게 보여줬다. 모바일 폰으로 예약상황을 체크한다.

 

 

 

 


베르린에서 친지집에서 하루 묵고, 다음날 투어를 나선다. 2층 버스를 타봤는데 시야가 괜찮다.

 

 

 

 

 


백화점에도 둘러보고...
실내장식은 잘 되어 있지만 전문가는 아니지만 건물의 설계를 눈여겨 본다.

 

 

 

 

 


시내에서 시내버스를 기다린다.

베르린의 시내버스의 티켓사용 방법은 꽤나 까다롭다.
소위 구간별로 끊는 티켓도 있고 돈을 더 지불하고 중간에 볼일을 보고 또 시내버스를 타는 티켓도 있는 것 같은데 모두 파악하지 못했다. 아시다시피 유럽의 모든 국가에서의 화장실 사용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

백화점과 공공시설 같은 곳은 가끔 무료로 이용을 하지만 집을 나서기전에는 꼭 화장실 볼 일을 꼭 보고 나가야 한다.

 

시내를 걸으며 혹은 동네를 걸으며 화장실을  사용한는 것이 너무 불편하고 불가능하다. 일반 집에 들릴 수도 없으며 공공화장실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외국 여행시 가장 불편한 것이 화장실 사용 부문이었다. 

 

 

 

 

 

2층 버스의 윗층의 실내이고

우) 1층,2층의 이동 계단이다.

 

 

 

 

 

2층 버스의 외부 광고이다. 파란 눈의 모델이 인상적이다. 미인이기도 하고............

 

 

 

 


 베르린 시내에 삼성 간판이 크게 달려있다.
자부심도 가끔 느끼기고 하고 이와 비교해 대그룹의 국내에서의 역할도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사진을 찍어놓고 어딘지 모르겠다.

 

 

 

 

 

베를린의 시청이자 시장이 집무하는 곳으로, 붉은 벽돌로 된 외벽 장식덕에 Rotes Rathaus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통독일 이전에는 동독의 수도인 동 베를린의 시청사로 사용되었고,  사회주의 동독의 상징인 건물이다. 지금은 통합 베를린의 시청사로 쓰이고 있다.

 

 

 

 

 

 
베르린에서의 유명한 곳 중의 하나인 '베르린 T.V 탑' 주변의 상가이다.
의 진열대에 이상한 것에 눈길이 간다.

베르린 장벽이 무너지고 그 벽돌의 조각을 이렇게 봉투에 넣어 판매를 한다.

 

 

 

 

 


▲ 베르린 시내의 자전거 투어를 위한 안내소이다.

 

왼쪽을 보면

City Tour & Topic tour

Potsdam Bike Tour

Food Tour & E-bike Tours   등이다.

왼쪽에 있는 메뉴는 가이드 동반이고

 

오른쪽은 그냥 바이크 빌리는 가격이다.

하루는 14유로 이고 일 수가 늘어나면 가격이 더 내려간다.

시간대 별의 가격도 나와 있다.

 

내 혼자 생각은 현지 사정을 잘 모르니 가이드와 같이 바이킹 하는 것이 괜찮을 것 같고 안전도 그렇고...
독일의 자전거 도시 하노버에서 자전거로 시내 투어를 해본 결과 자전거로 투어 하는 즐거움이 대단하다는 것을 현지에서 느꼈다.

환율은 대략 1유로에  1,350 원 정도 . 하루 빌리는데는 14유로 이니 한국돈으로 18,900원 정도의 돈이 든다.

 

 

 

 

 

 

 

 

 

 


베르린에 있는 ' 마리엔 교회'이다. 베를린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교회중하나라고 하고 원래는 성당이었지만 

말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로 교회로 바뀌었다고 한다.

유럽의 여러 도시를 둘러보며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기점. 소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시기의 역사적인 사건 등이 내내 궁금했다.
나중에 책을 꼼꼼히 읽어보기로 다짐했고.

 

 

 

 

 



마리엔 교회의 광장이다.

분수대가 인상적인데 동상에 철분가루 같은 것은 아마 오래된 것인지 아니면 인위적으로 그렇게 만든 것인지  어디에 물어볼때도 없고... 그랬다.

 

 

 

 

 

 

광장에 있는 여인 동상

 

 

 

 

가까이 가서 손으로 한 번 만져봤다. 윽~!  나의 손이 무척 짜릿하다. 이거 만지면 꼭 장가갈 수 있을 것도 같기도 하고해서...
청동의 색깔이 인위적인지 자연적인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어쩜 인위적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뭘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여인상 앞의 포도를 봐서는 성경과 연관이 있는듯.

 


 

 

 

 

 

 

 

 

 

 

 

 

 

 

 

아마 성직자들의 묘와 연관이 있는듯 하다.

 

 

 

 


베르린에 고모와 누님들이 사신다.
고모와 같이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이 피곤을 잊게 하고 음식이 상당히 맛깔스럽다.

 

 

 

 

 

 


쌀의 퀄리티는 국내산과 많이 뒤떨어진다. 아마 베트남에서 생산되는 쌀 같기도 한데 쌀에 윤기가 없고 찰기가 국내산에 비교해 많이 뒤떨어진다. 배가 고파서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입에 구겨넣는다.

 

 

 

 

 

어딘가에 갔었는데 수족관이 있다.

 

 

 

 

 

멀리 보이는 것이 베르린 t.v 탑이다.
사람들이 많이 분벼 올라가지 못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여기가 베르린 대성당이다.
안에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베르린에는 오래된 신.구 교회 건물이 공존하고 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베르린을 통과해 흐르는 강 '슈프레' 강이다. 강과 주변의 풍경과 잘 어울린다.

 

 

 

 

 


역시 t.v 탑

 

 

 

 

 

 

베르린을 통과해 흐르는  '슈프레' 강이다. 유람선도 다니고 보기에 좋다. 강에 오염은 별로 되어있지 않은듯 하다.

 

 

 

베르린 대성당

 

----------------------------

 

자료출처: 두산백과

 

1747년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검게 그을린 듯한 벽면과 푸른빛의 돔 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엄청난 폭격을 받아 본래의 화려함을 거의 소실하고 아주 단순하게 바뀐 것이라고 한다. 프로이센 왕과 독일제국 황제를 배출한 명문가인 호엔촐레(Hohenzolle) 가문의 묘지 용도로 지어진 교회였기 때문에 지금도 안에 들어가면 눈부시게 화려한 호엔촐레 가문 사람들의 관들이 있다.

스테인드 글라스와 천정의 모자이크화가 아름다운 교회 안에서는 종종 오르간 콘서트가 열리기도 한다. 성당 바로 앞에는 루스트가르텐(Lustgarten)이라고 하는 넓은 잔디 정원이 조성되어 있어 시민들과 관광객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한다. 이 정원은 원래 채소밭이었다가 나중에 녹지로 변경되었다. 나치 정권 때에는 이곳을 시위와 퍼레이드하는 곳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

 

 

 


불에 그을린 듯한 흔적이 있다. 전체적인 건물의 분위기가 전통 가톨릭 교회와 건물의 외관이 조금 다른듯 하다.

 

 

 

 


앞으로는 마틴 루터의 벽면상이 만들어져 있다.

 

 

 

 

지붕은 돔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2차 세계대전 때  아름다운 건물이 많이 손상되었다고 한다.

 

 

 


'페르가몬 미술관' 이다.
들어가 보지 못했고 또 나중을 기약해 본다.
규모도 크고 볼거리도 많은 것으로 아는데 정말 아쉽게 되었다.

페르가몬 미술관은 베를린의 가장 대표적인 미술관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헬레니즘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며
 '페르가몬' 은 지중해의 터키 서부 에게해 지역에 있는 고대 도시 이름으로, 독일은 이 페르가몬의 유적을 발굴해 가져와 그 시대를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눈에 많이 익는 베르린의 '브란덴부르크' 문이다.

 수 십년전에 이곳에 왔었는데 기억나는 것은 역시 맥주에 취한 것 밖엔 없는 것 같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운터덴린덴가 서쪽 끝, 동·서 베를린 경계선이 있던 근처에 있으며 지금은 무너진 베를린 장벽 바로 뒤에 있는 이 문은 카를 G. 랑간스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프로필라이아를 본떠서 1788~91년에 세운 것이다. 베를린의 개선문인 이 문 위에는 4마리 말이 이끄는 2륜마차 동상 '승리의 콰드리가'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출처: 다음백과)

 

 

 

 

 


시청사 같다. 자세히 둘러보지 못함

 

 

 

 

 

 

 

이곳이 '유대인 박물관'이다.

좌) 관광객들의 입장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꺼번에 입장하는 숫자가 그렇게 많지않아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우) 입구에는 간략한 설명도 해두고 있다.

 

 

 

 

독일 유대인 박물관의 전경/ 이렇게 넓은 공간에 만들어진 유대인 박물관. 외형으로 봐서는 설치예술적인 면이 강하다.

각각의 모형들이 틀린 사각형의 설치물들이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지만 엄숙하다.

 

 

 

 

방문자들의 주의사항을 적어두었다. 일반적인 사항들이다.

 

 

 

 

 

▲유대인 박물관 전경/ 가운데 조그만 건물이 티켓팅 하는 건물이고 오른쪽에 입장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지하로 내려간다.

 

 

 

 

들어가기 전에 팜플렛을 읽어본다. 영어와 독일어로 되어 있다.

 

 

 

 


 

전경. 왼쪽  아래부분의 계단으로 내려간다.
전체적인 조형물의 특징은 무엇을 상징하는듯 하다. 바닥은 평면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굴곡을 지어 만들어 놓았다.
영문도 모르는 아이들이 숨바꼭질하기에 좋게 만들어져 있으며 네모형태의 공동묘지의 형태일까?

도시 한 복판의 넓은 곳에 이렇게 유대인 박물관을 만들어 놓았다.

 

 

 

 

 

연도별로 나치가 저지른 일들을 사진과 함께 잘 만들어 좋았다.

 

 

 

 

 

유대인들의 피해를 설명해 두었다.
영어실력은 없지만 해석을 해본다.

Jews with the German Reich also faces persecution on a news scale when the war broken out in 1939.
The German leadership
gradually abandoned its policy of pressing Jews to emigrate, and began deportations to outlying areas under German control: In the autumn of 1939 and in the course of 1940, Austrian, Czech, and German Jews from various towns and regions were deported to France and to occupied Poland.
Sinti and Roma were deported as well. 

 

독일제국과 함께 한 유대인 또한  1939년도에 발생한 전쟁때 대규모의 박해에 직면한다.

독일의 지도자들은 점차적으로 유대인들을 강압적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포기했고 독일의 통제아래 외곽지역으로 이송하기
시작했다.

1939년 가을과 1940년 동안, 여러 마을과 지역으로 부터온 오스트리아,체코, 독일 유대인들은 프랑스와 식민지 폴란드로 이주되어졌다. 신티와 로마도 그랬었다. 

 

 

 

 

 

 

앞에 보이는 사진들은 유대인들의 살아생전의 모습같다.

 

 

 

 

 

이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사진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왼쪽 사진은 사람의 시체를 불도저로 미는 장면인데 끔찍할 만큼 잔인한다. 독일인이 저질은 만행들을 훗날 자국민들과 세상에 보여줌으로 자기들이 저질은 잘못을 진성성 있게 반성하는 독일인의 모습과 그렇게 하지 않는 일본인과 비교가 된다.

 

Bergen-Belsen, April  1945, after liberlation by the British Army : The site is strewn with the corpses of prisoners.

To reduce the risk of an epidemic , numerous mass graves have to be prepared and the existing barracks burnt down.

Among the dead are the few survivous.

 

1945년 영국군의 해방이후, 네들란드의 베르겐,벨젠(독일의 마을: Bergen과 함께 나치 강제 수용소 소재지로 알려져 있다.):

죄수들의 시체가 널려있다.

전염병의 위험을 감소시키기 위해, 수 많은 공동묘지들이 만들어졌으며 그들이 머물던 막사들은 불에 태워졌다.

이때 죽은 사람들 중에 몇몇만이 살아남았다. 

 

 

 

 

 

 


위의 편지는 유대인들의 그 당시 처참함을 보여주는 편지이다.

 

Now we know all the terrible details 5,000 Jews are taken to Ponar instead of Kovno and shot .

Like wild animals before dying, people began, in their fear of death , to break open the railway wagons, smashing

in the small windows reinforced with strong wire.

Hundreds were shot as they tried to flee. Over long stretches the track was strewn with corpsers.

 

 5,000명의 유대인들이  Kovno 로 가는 것과 총살형 대신에 Ponar 로 이동되었다는 섬뜩한 사실들을 알게된다.

죽어가기전 야생동물 처럼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서 강철 와이어로 막혀진 작은 창문을 깨뜨리며 열차 객실을 억지로 열려고 했다.

수 백명의 사람들은 도망치려고 할때 총에 맞았으며  길게 늘어선 기차 트랙은 군인들로 가득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