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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은 수련원]가톨릭 안동교구의 기도,공부,대화,체험하는 집 /경북 예천군 지보면

 

 

 


  # 농은 수련원

 

- 주소: 경북 예천군 지보면 암천리 57

- 전화:  054-652-0591
- 카페 : 
http://cafe.daum.net/nongeun.or.kr

 

- 농은 홍유한(隴隱 洪儒漢, 1726-1785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것이 1784년, 이보다 30여 년 전에 이미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심신을 연마한 선각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농은 홍유한(隴隱 洪儒漢, 1726-1785년)이다.

 

비록 물로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그가 천주교를 대하는 입장은 단순히 신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천지만물의 이치를 밝히는 종교적 요소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스스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첫 인물로 꼽힌다.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九邱里)는 바로 그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그는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문하에서
천주학을 처음 접한 뒤 유교와 불교에서 구할 수 없었던 진리를 발견하고 바로 이곳에서 1775년부터 1785년까지 10년간 학문을 통해 깨달은 신앙의 진리를 실천했다.

 

본래 구구리는 순흥부 동원면(順興府 東園面) 지역으로 마을 뒷산에 무학봉이 있는데 “학이 구고(九皐)에서 우니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는 시전(詩傳)에 있는 옛 뜻을 따라 ‘구고’라 하였다 한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오현리, 이목리와 등영리, 상암리 각 일부를 병합해 ‘구구리’라 하여 영주군 단산면에 편입되었다.

 

홍유한은 본관이 안동현의 풍기(豊基)인 풍산 홍씨(豊山 洪氏) 명문가의 16대손으로 서울 아현동에서 홍창보(洪昌輔)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미 8세경에 사서삼경(四書三經)과 백가제서(百家諸書)에 통달한 신동으로 전해진다.

 

그의 조부모는 손자의 장래를 위해 고향인 충청도 예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를 했고 16세 때인 1742년 그는 당시 유명한
실학자인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순암 안정복, 녹암 권일신, 복암 이기양 등과 함께 수학했다.

 

1750년경 성호 이익이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 등 서학(西學)을 연구할 때 그의 제자들도 이 신학문과 종교 서적을
탐독하게 됐고 이때 그는 천주교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당시 성호 이익은 서학을 받아들임에 있어 피상적인 보유론적 입장에 머물렀고 함께 수학하던 순암 안정복은 천주교 신앙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고 배격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홍유한은 유교와 불교에서 발견하지 못한 진리를 여기에서 발견하고 1757년 고향 예산으로 내려가 1775년까지 18년간
홀로 신앙을 연마했다.

 

그는 천주교의 진리를 처음 깨달은 후부터 스스로 신앙생활을 시작해 “칠극”에서 터득한 덕행을 쌓기 위해 매월 7일째 되는 날을
주일(主日)로 정해 세속의 모든 일을 전폐하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다.

 

나아가 욕정을 금하여 30세 이후는 정절(貞節)의 덕을 실천했다. 그리하여 천진암 강학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그는 서학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스스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최초의 수덕자로 기록되었다.

 

그러던 중 다시 1775년 더욱 조용한 곳을 찾아 경상도 소백산 아래 있는 순흥 고을 구고리(현재 영주군 단산면 구구리)로 옮겨 가서 1785년 6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행과 절식, 기도와 묵상으로 만년을 보냈다. 선종 후 그의 시신은 문수산 자락에 있는 우곡리에 안장되었다.

 

천주교 안동교구는 1997년 교구 수련원을 건립하면서
이 수련원이 선생의 삶을 본받아 신앙을 향한 열정과 노력을
더욱 키워갈 수 있는 집이 되기를
바라며 그의 호.號를 따라 ' 농은 수련원"으로 이름 지었다.

 

 

-시설

  사무실, 강의실,소성당, 성당, 강당, 식당 , 침실, 수녀원 등

 

- 농은수련원의 용도

   신자들 교육, 초, 중고등부 여름 신앙 캠프 ,  피정,  신부님들 교육 등

 

- 담당신부 : 김종길 제오르지오
   

 

 



 


  2015년 1월 31일(토)~2월 1일(일), 1박 2일 동안 농은수련원에서 2015년 안동교구 사목임원 연수가 있었다.

 내가 다니는 울진성당에서 이것저것 역할을 맡아 꽤나 오랫동안 봉사를 해왔지만 임원 연수에 내가 간다고 하니 괜히 주님께
 미안해 진다.( 회장단에서 일이 바쁘서
대타의 역할의 의미가 더 많음)

 

 임원 연수는 성당 일에 몸소 희생하며 돈독한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이 가야하는데 그렇지 못한 내가 그 소임을 맡았다는 것이
 더 부끄럽웠다.

 농은수련원의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동안 여러차례 가톨릭 관련 교육을 위해 방문한 적이 있으며 먼거리로 인해 토요일 일찍 불영계곡과 봉화 방면으로
 차를 몰았다.

 짐을 풀고 연수 스케줄을 보니 의외로 상당히 빡빡한 일정이다. 밤 10시까지 휴식시간 이외는 짬이 없을 정도로 줄기차게

 교육을 받았다.

 안동교구는 

 안동지구, 동해지구, 문경지구, 북부지구, 상주지구, 의성지구, 해외교포사목 로 지역별로 총 38개의 본당으로 구성이 되어 있으며

 주교는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머) 신부님이 맡아 사목을 하고 있으며  울진성당은 동해지구에 포함이 된다.

 

 울진성당과 북면성당은 농은 수련원에서 가장 먼 성당으로서  농은 수련원에서의 교육시 거리로 인해 일어나는 각종 배려를 
 많이 받는다.

 

 연수를 받으러 온 신자 대부문은 각 본당에서 사목활동을 열심히 하는 분들로 구성이 되었다.

 인사를 하고 담소를 나누고............

 

이틀째 되는 날은 주교님 미사집전으로 주일미사를 보고, 참석자들과 분임 토의도 하고, 차도 같이 마시고 그렇게 1박 2일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같이 다녀온 김재훈( 성우 안토니오) 형님께 수고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들어서서 입구에 붙어둔 머릿돌을 읽어본다.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에 있어 한 눈에 어떤 집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기도하는 집', ' 공부하는 집', ' 대화하는 집', ' 체험하는 집'
'체험하는 집'에는 꾸르실료 교육도 포함되는듯 하다.

 

 

 

 

 

1. 도로에서 들어가는 입구                                  2. 도로에서 조금 들어가면 농은 수련원이 보인다.
     3. 농은 수련원의 전경                                         4. 별관 강당

 

 

 

 

 

 


1. 수련원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른다. 풍경이 뛰어나고 전망이 아주 좋다.

2. 예수님 像
3. 수련원 앞의 풍경

4. 2번의 예수님 상 봉헌내용: 작고하신  부모님의 사랑을 기리고자 예수상을 안동교구에 바친다는 내용

 

 

 

 

1. 수련관 침실복도
2. 침대포와 베게피 등/ 침실 사용자는 자기전에 침대포와 베게피 등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3. 계단 층별 구분의 디자인이 예쁜 것 같다.
4. 침실내부: 들어서면 한 눈에 검소하고 소박한 침실임을 느낄 수 있다. 고급 호텔보다는 시설이 못하지만 느낌은 그 이상이다.

 

 

 

 

농은 수련원에 대한 소개와 침실사용 방법 등이 침실에 작은 액자로 만들어져 있다.

 

 

 

 

1. 바오로의 딸 수녀회에서 가톨릭 서적 홍보차 나왔다.
2. 세면도구 구입처 ( 셀프)

3. 방문자 쉼터이다.

4. 성물코너 : 가톨릭 성물을 구입할 수 있다.

 

 

 

 

 

예수님과 마리아상/ 한국적이고 특히 성모 마리아의 인상이 아주 포근하게 만들어져 있다.

 

 

 

 

 

1. 겨울철에는 1층 광장에는 나무 난로가 만들어져 있는데 상당히 화력이 좋고 멋있다.
2. 층별 안내도
3. 2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다 본다.

4. 1층 쉼터에 비치된 가톨릭 관련 책자

 

 

 

 

 

 

수련원에서는 성당이 두 개 있다. 큰 성당과 소성당. 위의 네장의 사진은 모두 큰성당이다.

1. 큰성당의 실내 / 실내 건축 디자인이 특이하다.
2. 실내

3. 천정을 보았는데 굴뚝 처럼 위에 뻥 뚫혀있다.
4. 교구장님 미사집전
( 왼쪽은 교구청 사목국의 황재모 안셀모 신부님 , 가운데 주교님, 오른쪽은 교구청 사무처장 김학록 안셀모 신부님)

김학록 안셀모 신부님은 안동교구청사 재건립 일로 많이 바쁘시다.

 

 

 

 

 

 

1. 단체 모임방/ 분임토의를 하고 있다.
2. 입구 사무실 앞의 성모님과 꽃꽂이

3. 준비실/ 각종 사용자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 놓은 준비실

4. 이날 방문자들을 위해 다과를 준비

 

 

 

 

 

1. 교육실

2.안동교구사명 선언문
(짧은 글귀 안에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열린마음, 소박,생명, 나눔, 섬김, 기쁨.... .)

우리는

이 터에서

열린마음으로

소박하게 살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서로 나누고 섬김으로써

기쁨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

 

 

 

1. 소성당에 있는 스테인 글라스/ 울진본당에도 이렇게 예쁜 그라스를 설치했음 좋는데...
2. 1층의 뒷편 야외에 있는 예수님상

 

 

 

 

 

소성당의 모습/ 상당히 정갈하고 엄숙한 느낌이 든다

 

 

 

 

 

소성당 입구의 성수대


*성수(聖水, 라틴어: Aqua benedicta 아쿠아 베네딕타)는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축성된 이다.

사제주교 등의 성직자세례 또는 사람, 사물 따위를 축복하거나 악에 대항하려는 등의 목적으로 사용한다.

성수는 세례성사를 거행할 때 사용하는 전례용 기구인 성수대 안에 담아 보관하는데, 성수대는 보통 성당 또는 세례당의 입구에 있다. 성당과 세례당 등의 건물 입구에 성수대가 있는 것은 신앙에 입문하는 기본적인 전례로서의 세례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
성수대라고 불리는 작은 그릇은 보통 성당 입구에 설치한다.
입당을 알리는 신호에 맞추어 신자들은 성당 안으로 들어갈 때 성당 입구에 놓인 성수대에 채워진 성수를 손가락에 찍고
십자성호를 긋는다.
주일마다 전례를 시작할 때 강복을 하는 예절 속에 성수를 교우들에게 뿌리는 의식이 포함되어 거행된다.
이 예절을
성수 예식이라고 부르며, 기원은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성수를 뿌릴 때는
성수채라는 솔 또는 가지 모양의 물건을 사용한다.
성수채는 성수를 담는 그릇인 성수대에서 성수를 떠낸다.
전통적으로 성수에는 신학적인 의미와 함께 물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 약간의
소금을 첨가한다.

- 위키백과 사전 출처

 

 

 

1. 성수대에 담는 성수를 보관하는 단지/ 성당 마다 성당의 한쪽에 비치를 한다.

2.  '십자가의 길'

* 의의와 유래 :

십자가의 길은 예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후,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 산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열네 가지 중요한 사건(수난과
죽음의 중요한 장면)을 묵상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초대 교회 예루살렘순례하던 자들이 영신 생활에 도움을 얻기 위해, 실제로 빌라도 관저에서 갈바리아 산 십자가가 세워진 곳까지 걸으면서 기도한 데서
비롯되었다(1,300여 보, 700여 m).


 그러나 이곳 순례정치적, 지리적 방해를 받게 되자, 중세기에 유럽에는 성지 모형의 십자가의 길이 만들어졌다. 이는 특히 프란치스코회에서 널리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교황 인노첸시오 11세는 모든 성당십자가의 길을 마련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 후 1731년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14처(處, Station)로 고정하였다. 이 처(處)란 말은 15세기 성지순례하던 윌리엄 웨이가
 
예루살렘의 비아 사크라(Via Sacra, 거룩한 길)를 이렇게 일컬은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는 오늘날 대사를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기도로 발전하였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고통의 길)라고 하는 이 십자가의 길은 초세기부터 존경스런 길이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그리스도 신자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성모님께서도 매일 이 길을 걸으셨다고 한다.

   1520년 교황 레오 10세는 성모님의 일곱 가지 고통을 설명하면서 각 처마다 백일 한대사(限大赦)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1637년에는    교황청에 의해 십자가의 길이 오늘날처럼 완성되었다. 1686년 교황 인노첸시오 11세는 프란치스코회 성당십자가의 길 설립을
   허용하였다.


   * 신심 : 우리는 희생십자가를 지고 당하셨던 그리스도수난고통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자신의 처지와 생활을 반성하고 그리스도 수난에 참여하는 자세를 키워야 한다. 그리고 인류를 사랑하사 하느님화해제물이 되시고 죄인을 위해 희생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와 일치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십자가의 길은 십사처가 모셔 있는 성당에서 해야 하나, 야외에 모셔진 곳에서 할 때는 처음과 끝은 성당에서 하도록 한다. 그러나 성당이 너무나 멀어 갈 수 없는 경우(항해 중, 병석, 감옥 등)는 방사한 십자가를 들고 하면 대사를 얻을 수 있다.

-출처:가톨릭 굿뉴스


3. 소성당 입구에 이렇게 신발 놓은 자리에 번호를 매겨두었다. 혼잡을 피하기 위해, 질서를 위해 이렇게 해두었다.

 

 

 

 

 

잠시 시간을 내서 성직자 묘지를 찾았다.

나도 언제가는 가야하는 길. 먼저 가신 신부님께 가서 영원의 안식을 기도드렸다.
묘지 앞에 서니 생각할 것도 정리할 것도 느끼는 것도 정말 많다. 맨 가운데 주교님의 묘지도 있고 앞으로는 신부님들의 묘지.

1. 성직자 묘지 표지판

2. 수련원 한쪽에 모셔 두었다.

3. 성직자 묘지

4.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조망이 시원하다.

 

 

 

 

 

식당을 찾았다. 소박한 시설과 부담없는 분위기에 기분 또한 좋다.

1. 1박 2일 동안 4끼의 식사를 했는데 왠 밥맛이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근데 나는 왜 이렇게 많이 먹을까?
2. 늦은 밤 친교의 밤 행사때 영덕에서 공수해온 피데기

3. '음식을 남기지 맙시다.'--> 이 세상에 굶고 있는 사람들을 기억하자라는 문구와 벌금이 1,000원이다.

4. 식당 내부의 모습 

 

 

 

 

 

경상북도 도청이 이 부근에 이전을 한다. 수련원과 거리는 조금 떨어져 있데 부지가 상당히 넓다.

이 구역은 아마 부대시설들이 들어설 것 같다. 경상북도 도청 신청사 부지건설 현장

2. 사진의 오른쪽 아파트는 아마 공무원들 아파트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