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계서원의 모습
# 방문일자: 2014년 8월 31일(일)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정명리 에 있는 조선 후기 서원으로
[출처] 울진디지털문화대전 http://uljin.grandculture.net/ |
디지털 울진문화재대전: http://uljin.grandculture.net
황응청(黃應淸, 1524~1605) 황응청은 평해 인으로 자(字)는 淸之(청지), 호(號)는 대해(大海)로 당시 평해군 지금의 기성면 정명촌(正明村)에 살았다. 1552년(명종 7)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 1560년(명종 15)에 세자의 입학을 경축하는 별시문과에 응시하였다가 책제(策題)에 좋지 않은 말이 있음을 보고 과장을 뛰쳐나왔다. 그 후 두문불출하고 산림에 묻혀 유유자적한 삶을 살면서 행실을 더욱 바르게 하고 절조를 닦았다. 부모와 형제 사이에 효제(孝悌)의 도리를 다하여, 양친이 돌아갈 때마다 각각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 같은 지행고절(知行高節)과 효성에 감동한 고을 군수들이 관찰사에게 알리어 1578년(선조 11)에 살아 있을 때 정려가 내려졌다. 1584년(선조 17) 조정에서 학행지사(學行之士)를 수용할 때 그도 반열에 들어 예봉사 참봉(禮奉寺 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다시 개성 연은전(延恩殿) 참봉에 제수되었는데, 일단은 명을 받들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사직하였다. 1594년(선조 27) 조정에서 장원서 별제(掌苑署 別提)로 그를 불렀다. 당시는 왜란을 치르고 있을 때였는데, 마침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였다가 환도하였다. 이에 신하의 의리로 끝내 자신의 지조만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대궐로 나아가고 아울러 시폐(時弊) 4조를 논한 상소를 올렸다. 선조가 그의 상소문을 가납하고 그를 진보현감에 임명하였다. 진보현감으로 부임하여 포용력 있는 정사로 다스리다가 2년도 채 안 되어 정명리로 돌아와 버렸다. 낙향 후 후학을 가르치며 독서와 사색으로 사상의 경지를 넓혀갔으며 월천 조목(月川 趙穆, 1524∼1606)이나 대암 박성(大菴 朴惺, 1549~1606)과 편지를 주고받고,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1538~1609)등 당대 지성들과의 교류를 갖다가 1605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1671년(현종 12) 기성면 정명리에 있는 명계서원(明溪書院)에 봉안되었다.
2)황여일(黃汝一, 1556~1622) 1576년(선조 9)에 진사가 되고 1585년 개종계별시문과(改宗系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겸춘추관기사관(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을 시작으로 경상도어사(慶尙道御使), 1592년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맡았다. 1593년 형조정랑(刑曹正郞), 병조정랑(兵曹正郞)을 거쳐 1594년 형조정랑이 되고, 곧 도원수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행주대첩에서 많은 공을 세운다. 1598년 명나라와 국교가 위태롭자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를 정사(正使)로, 해월은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가서 외교에 공을 세운다. 1601년 예천군수를 거쳐 1611년 길주목사(吉州牧使), 창원부사(昌原府使), 1615년에 동래부사, 공조참의 벼슬에 오른다. 1758년 고을 사람들이 기성면 정명리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과 배향하였다.
#건축물
명계서원은 원래 현재의 위치보다 조금 아래쪽에 있었으나 홍수 등의 재해로 지금의 위치로 1758년 옮겨 세웠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기 전에는 강당과 사당, 동재인 솔성재(率性齋), 서재인 수도재(修道齋), 1982년 지방 유림에서 서원과 덕유사(德裕祠)를 복설하였다. 건물은 강당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형에 따라 고저의 차이는 있지만, 건물의 축은 일직선상에 두었다. 사당은 정면 2칸, 측면 한 칸 반의 맞배기와집으로 단청을 하고 측면에 풍혈판을 달았다. 3량가에 겹처마를 하고, 전열의 기둥만 강당은 ‘상교당(尙敎堂)’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으로 3량 구조에 홑처마로 꾸몄다. 마루와 방의 전면으로 모두 툇마루를 두었으며, 방들의 툇마루 아래는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경내에는 덕유사(德裕祠), 격치재(格致齋), 독역재(讀易齋)라는 현판과 비석 1기가 있다. # 1758년 명계서원 이건공사 기록 1758년에 거행된 명계서원 이건 행사는 당시 초헌관을 맡았던 복재(復齋) 이춘룡(李春龍, 1701-1770)의 일기에 그림처럼 펼쳐진다. 개인이 기록한 일기 형식으로 지역의 18세기 서원의 모습과 일하던 정황을 잘 묘사하여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이건 일기는 이춘룡의 후손인 이태호씨가 보관하고 있는데, 중요 부분의 대략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서원은 1671년(현종 12)에 창건하였으니 그 터가 심히 낮아 지금의 우측 백호자락이 끊어진 끝머리로 두 하천이 그 후 정해(丁亥) 및 을축(乙丑)년의 큰 홍수에 대문이 떠내려가고 재소가 물에 잠겼다. 어찌할 겨를도 없이 탄식만 할 뿐 황류(黃流) 물결이 누(樓)의 계단까지 올라오고 둑이 거의 파여 나가는 급한 형편이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이건하기로 논의하였으나 정인년에 동규(洞圭 : 마을원로) 황종하(黃宗夏)가 40전(錢)을 희사하였고, 다음 해에 또 곡식 십 두(十斗)를 기금으로 세워 여럿이 각각 분담하자고 말하기를 “우리가 함께 힘을 다하면 반드시 하나로써 열을 얻어 준공할 수 있을 것이라” 하고 (중략) 봉안(奉安)과 추향(秋享)하는 대례(大禮) 날이다. 옷깃을 여미고 제단을 성대하게 마련하니 싱그러운 바람과 맑은 달이 서로 교감하는 듯하였다. 아! 이건(移建)하고자 함이 여러 해였으나 이루지 못했다. 합향(合享)을 옛 좋은 시절에 행하지 아니하였음은 돌아보니 우리가 사묘(祠廟)를 전의 모습을 따라 반듯한 강당으로 점점 넓혔고 전에 없었던 별채 누사(樓舍)를 증축하였다. 옛 법식에 의한 건물 배치로 모두 동규(東規 : 주자강학소의 서원 규정)의 건설에 따른 것이다. 비록 백록동 서원의 모습에는 모자라지만 사당과 누대(樓臺)는 오히려 옛날의 단출함보다는 나아졌다. 또한 전에는 서재에 현판이 없었고 다만 누대 중에 서원의 이름 편액 하나만 걸려 있었다. 새롭게 선사(仙槎 : 울진)의 원남면 매화의 윤사진(尹思進)의 글씨로 현판을 새겼다. 윤사진의 서법은 인근 군·읍에서 명성이 높았다. 당을 명교(明敎)라 하고, 누(樓)를 영방(盈放)이라 하였다. 선비는 지혜로 경영하고 양민들이 호응하였다. 매일 열심히 공역함에 선비들은 수고로움을 잊고 양민들은 또한 원망하는 자 없었다. 이는 덕(德)을 존중하고, 의(義)를 즐기는 인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같기 때문이다. 서고(書庫) 책임에 장응한(張應漢), 물자 관리에는 을선(乙先), 노비의 인솔에는 강영(江永)으로 하였다. 선임 노비들로 하여금 모든 노비들을 관리, 목수들의 일을 도왔다. 재목도 공교하게 다듬고 벽을 바르는 일 등에 손이 갈라 도목수는 우천명(禹千命)이고 김중구(金重九)와 남윤찬(南允贊)이 보좌했다. 이에 전말을 서술하여 일기책 머리에 적는다. ■ 정월 - 무인(戊寅, 1758) 정월(正月) 6일 계축 비 조금 내림, 사당 터 사역 처음 시작함. 서원 인부 약간 명. 지휘도감 우천명(禹千命).
- 1일 정사 맑음. 황보동 여러 명과 전일 미참자 여러 명 참여.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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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좁은 길에 세워두고 멀리서 바라보았다.
왼쪽의 농로가 들어가는 길 / 차는 못 들어간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길
▲서원 앞에서 서서 명계서원을 본다. 얕은 골 안에 자리를 잘 잡았다.
▲들어가는 입구에 '명계서원건치 연혁비'가 서 있다.
▲명계서원에 대한 간략한 안내문이 있다.
▲급경사의 돌계단
▲왕거미가 거미줄로 먹이를 유혹하고 있는데 거미의 크기가 무서울 정도로 크다.
거미줄에서 문화재에 대한 현대인들의 관심을 읽을 수 있어 안타깝다.
▲전경
▲측면에서 바라본다.
제초는 앞 부문만 조금 되어 있고 인적이 더물다.
문은 모두 안으로 잠겨있다.
▲서원의 앞으로는 확틔인 모습이며 작은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시원한 여름바람과 함께 그 시절 글 읽는 소리 등을 상상해 본다.
▲'독역헌'/ '주역,역학을 읽는 집' 이라는 뜻 일까? 나의 해석이 그렇다. 그리고 동쪽의 위치에 있는 방
▲'격치제'/ 서재의 개념의 방 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서쪽에 있는 방 이름이 격치제이다.
▲영정을 모셔둔 사당에서 본 아래 모습
▲위패가 모셔져 있다.
▲아래에서 본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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