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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것들/살아가는 이야기들

하느님과 형평성

 

# 하느님과 형평성

                                                        - 2005년 10월 9일

 

작년 늦여름쯤 내가 사는 이웃의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다.
연세는 93세. 참 오랫동안 세상을 사신 분이기도 하시다.
현재 울진읍 명도리 2리의 이장님 모친이신 그 할머니는 고령의 그 연세에도 지나가다 말을 걸면
 나지막한 목소리로 “어딜 갔다 와? 밥은 먹었는가?” 참 으로 자상하게 나 에게 대해 주신 할머니이기도 하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내가 집으로 할머니를 뵌 적이 있었다.
지금은 수원 빈첸치오 병원에 계시는 루이제 수녀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 하셨다.
 “알비노 형제! 그 할머니 대세 받으셨어! 세례명은 마리아야!” 나는 깜짝 놀랐다.
평소에 종교에 전혀 관심도 없으신 분께서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 이다.

초등학교의 한 학급학생 50명이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한 목적지로 향하기로 마음먹고,
공부도 같이하고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고 놀기도 같이 놀고 있었는데
 대뜸 서울의 어느 초등학교 학생이 전학을 와서 그 반에서 같이 놀자고 한다.
대충은 우리가 사는 사회의 어느 집단이든지 우리 인간으로 구성 되어 있다.
한 개체, 한 개체의 인간이 모여 한 집단을 구성해서 같이 일하고 같은 목적으로 움직인다.
 같이 일을 하다보면 정도 들고 그들만의 삶의 여러 가지의 공통분모가 생기게 마련이다.
이러한 공동체나 단체에 어디 다른 곳에서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내 집안 식구라고 들어오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똑 같은 환경에서 일을 한 사람들은 똑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형평성에 맞는다는 것 이다.

세 명의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다. 이 집안에서 아버지의 말씀은 곧 법이다.
그래서 아들들 에게 한 달에 꼭 100원씩의 돈을 아버지께 가져오라고 했는데 세 명의 아들들은 모두 100원의 돈을
 아버지께 가져와야 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형평성 이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이러한 관계는 아니다.
100원을 가져와도 좋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거꾸로 아버지께 100원을 도로 달라고 해서 아버지는 할 말이 없는 것이
하느님과 우리 신자들의 관계가 아닐까 싶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대세를 받으시고
내가 농담 삼아 본당의 어느 신자 분 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사람이 일평생을 살다 죽기 바로 전에 하느님 나라의 문을 노크를 하면 그동안 수십 년 동안 하느님을 위해
산 사람들의 입장은 어떻겠냐?”

밤나무 밑에서 밤을 줍다 높은 하늘을 쳐다보고 싶은 요즘,
동네 이장님께 어쩌다 한 번 종교 이야기가 나오면 할머니의 세례명인 “마리아”에 대해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리 중에 가장 내가 자신 있게 설명 할 수 있는 말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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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2005년 8월 ~ 2011년 9월까지 '울진성당 주보'의 [세상사는 이야기]와 '가톨릭 안동교구 공소주보'의 장기필자로서
기고한 글 입니다. 좋은 글은 아니지만, 그냥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이 아쉬워 블로그에 정리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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