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물이 흐르는 쉼터이다.
1구간의 대표적인 쉼터이며 한 여름에는 더위를 식힐 수 있는 좋은 쉼터이다.
# 울진 금강소나무 숲길 1구간 * 예약할때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며 인터넷 예약을 하면 울진숲길에서 확인 전화합니다. 1) 당일 산행( 1인 기준) - -- 9,000원 ( 점심 1상 + 원점회귀 시내버스 ) 2) 1박 2일(1인 기준) ------ 31,000원 ( 저녁 1상 + 아침 1상 + 점심 1상 + 원점회귀 버스 + 1박 민박비 ) 상세내용 * 민박 ------------------- --------------------- 10,000원(1박/1인 기준) 민박시 식사비용(저녁, 아침,점심 3끼---------------- 18,000원(석,조,중식 /6,000원*3) 시내버스-------------------------------------- 3,000원 합계----------------------------------------- 31,000원 3) 종점에서 막걸리, 파전, 두부 등은 개인 지불 막걸리 6,000원, 파전 4,000원, 두부 4,000원 ( 일반 관광지의 양과 질이 다름 / 두부는 현지 촌두부) 4) 지불방법은 전부가 현찰로 현장에서 거래합니다.
3) 평소에 운동에 자신이 있으신 분은 그렇게 힘든 코스는 아닙니다.
# 참고사항
3. 매주 화요일은 산림휴일제로 인하여 숲길은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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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진의 가을 속으로 |
울진 금강소나무 숲길은 1890년경 울진과 봉화(춘양)을 왕래하면서 해안지방의 해산물과 내륙지방의 곡물 등을 물물교환하며 상거래 행위를 하던 보부상과 선질꾼들이 오고갔던 길을 개발해 만든 숲길이다.
# 숲길의 구간 전부 3구간으로 나눠 진행되며
1.숲길 1구간 : 13.5km
2. 숲길 2구간 :16.7km 소광 2리----- 한마무재(4.3km)----- 큰넓재(6.0km)--- 쌍전리 산돌배나무(8.8km)-- 양원역 (12.2km)-- 구암사 (13.8km) ---광회 1리 마을회관 (16.7km)
3. 숲길 3구간 16.3km 소광2리--- 저진터재(1.2km)--- 너삼밭(3.0km)-- 화전민터(6.8km)---- 금강송군락지(7.8km)---- 탐방로(9.3km)------
# 금강송 숲길 1구간의 역사적 의미
금강송 숲길의 옛이름은 "십이령 옛길"이다. 이들은 2.7일장인 울진장과 3.8일장인 흥부장 및 죽변장에서 주로 해산물인 소금.간어물.미역 등을 구매하여 족지게에 지고 십이령을 넘어 봉화장으로 가서 그 주위의 내성장.춘양장.법전장. 재산장 등에서 잡화와 약품 및 양곡.포목 등을 물물교환하여 울진에서 소천까지는 약 130리나 되는 먼 길이였다. |
▲숲길을 중심으로 주변의 지도/ 노란색은 자동차로 이동해야하는 도로이며 파란색 구간은 숲길구간 이다.
▲숲길 1구간의 고저도이다.
▲숲길 1구간의 구간별 거리 및 구간별 특징 등을 기록해 두었다.
▲울진에서 두천까지 가는 길은 전형적인 울진의 농촌풍경을 감상 할 수 있다.
▲한참을 가면 더구온천, 구수곡휴양림으로 가는 길과의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된다. 자동차로 약 10분 정도의 거리이다.
▲길 옆으로 추수가 벌써 끝이 났다.
▲두천 마을의 모습이다. 이 길은 울진에서 두천으로 가는 길이 아니며 마을 사진 촬영을 위해 일부러 여기까지 왔다.
숲길은 왼쪽 가운데 쪽에서 왼쪽 능선을 넘어간다.
▲오늘의 산행의 일행들이 준비를 하고 있다.
▲이귀남 숲해설가/ 주의사항과 참고사항 등을 설명하고 있다.
▲출발에 앞서 화이팅으로 기분을 올려본다.
▲원래는 이 구간으로 이렇게 이동을 하는데 가다가 중간에 비로 인해 통행불가.
돌아와서 마을을 통과 다른 길로 가게된다.
▲마을의 한 켠에 달린 노란 감이 가을을 노래하고 있다.
▲돌다리를 건너고 있다. 왼쪽 위에 살짝 보이는 정자가 '보부상 불망비'이다.
●1의 설명: 金泰熙 善政碑
조선시대 현령 김태희의 선정비로서 내성행상불망비 바로 옆에 있다. 선정비는 말 그래도 많은 좋은 일을 한 것에 대한 감사의 비석이다. '내성행상불망비'의 관심에 가려 김태희 현령의 선정비는 방문객들이 잘 모르고 그냥 지나간다.
●2의 설명: 울진 내성행상불망비의 모습
●3의 설명: 해설사사 내성행상불망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4의 설명: 돌다리는 건너면 자리하고 있는 불망비
(비가 많이 오면 이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을 가운데로 해서 논뚝 길로 가며 내성행상불망비는 볼 수 없는 길로 가게된다.
#참고 : 蔚珍 乃城行商不忘碑(울진 내성행상불망비)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두천리 에 있는 선질꾼 정한조와 권재만을 기리는 쇠로 만든 비.
[개설]
조선 말기 선질꾼들은 2·7일장인 울진장과 3·8일장인 흥부장에서 주로 해산물인 소금·건어물·미역 등을 구매하여 쪽지게에 지고 십이령을 넘어 봉화장으로 가서 그 주위의 내성장·춘양장·법전장·재산장 등에서 잡화와 약품 및 양곡·포목 등을 물물 교환하여 되돌아왔다. 또한, 봉화 지역에서도 행상이 간간이 울진 지역에 오기도 하였다.
울진군에서 봉화군 소천 지역까지에는 12고개[嶺]가 있어서 보통 십이령 또는 열두재로 칭해지고 있으며, 행상들은 3일이 걸려서 이 12고개를 넘어 소천 지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울진 지역 어디에서 출발하든지 간에 바릿재에 오르기 직전에 있는 두천리에서 일단 머물 수밖에 없어서 두천리는 주막과 마방(馬房)으로 흥했다고 한다.
[건립경위]
울진 내성행상불망비는 조선 말기 울진과 봉화를 오가며 어류·소금·해조류 등을 쪽지게에 지고 가서 곡식·의류·약품·잡화 등과 물물 교환하며 상행위를 하던 상인들이 그들의 상거래에 많은 도움을 준, 당시 봉화군 봉화읍 내성리에 살고 있던 봉화 사람 접장 정한조와 안동 사람 반수 권재만의 공을 잊지 못하여 그 은공을 기리고자 세운 불망비이다. 이러한 이유로 북면 두천리 지역의 주민들은 선질꾼비라고도 한다.
[위치]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두천리 206-1번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십이령으로 넘어가는 하천 입구에 세워져 있다. 울진읍 읍내에서 지방도 917호선을 타고 북면 방향으로 가다가 하당리 삼거리에서 북면 면사무소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약 2.5㎞를 직진하면 도착한다.
[형태]
권재만 비의 크기는 높이 94.5㎝, 폭 24.8㎝, 두께 2.1㎝이며, 무게는 29.4㎏이다. 정한조 비의 크기는 높이 93.3㎝, 폭 23.1㎝, 두께 2.2㎝이며, 무게는 26.4㎏이다. 울진 내성행상불망비는 비신(碑身)과 비수(碑首)를 하나로 주조하였으며, 비수의 문양과 비신의 글씨는 앞면에만 양각으로 주조하였다. 즉 비수에는 반원을 그리고 그 위로 점을 여러 개 돌아가며 표시를 하였는데, 이는 태양이 빛을 발하는 문양인 일휘문(日暉紋)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재질은 철로 이는 당시 울진군 북면 하당리에 철광산과 용광로가 있어 석비보다 제작이 쉬웠기 때문으로 추정하기도하나, 철은 다른 재질에 비해 강하고 영원하다는 믿음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돌보다 철로 만든 것으로 판단된다.
[금석문]
비신 가운데에는 세로로 “내성행상접장정한조불망비(乃城行商接長鄭漢祚不忘碑)”와 “내성행상반수권재만불망비(乃城行商班首權在萬不忘碑)”라는 명문이 각각 양각되어 있다.
[현황]
울진 내성행상불망비는 1995년 6월 30일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0호로 지정되었으며, 1999년에 지금의 보호각을 세우고 2006년에 보존처리를 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 말기 울진 지역 상품 유통 경로와 장시(場市)의 이해에 상당한 도움을 주는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가 있으며, 보부상들의 역사적 상황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출처] 울진디지털문화대전 http://uljin.grandculture.net
▲보부상 권재만을 기리는 철비
▲보부상 정한조를 기리는 비
▲산행길에 두천 마을이장을 만났다. 성함은 '장수봉' 이장님.
성격이 꽐꽐하고 시원시원하다. 본인 농장에 나는 야콘을 추수중인데 집에서 냉장보관된 야콘 한 박스를 갖고와 숲길 방문객들에게
한 개씩 서비스한다. 야콘의 즙과 야콘을 사드실 분은 전화하시면 된다. 장수봉 이장님의 전화 : 010-5363-5321
야콘의 품질은 믿을 수 있다.
숲길 1구간 출발점인 두천마을의 이장님이신데 민박과 마을과 야콘에 관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전화하면 된다.
민박은 개인적으로 전화해서 할 수 없으며 숲길 홈페이지를 통해만 민박과 숲길 탐방예약이 가능하다.
▲차량금지 차단목이다. 잠시 멈춰서서 앞으로 가야할 길을 잠시 짐작해 본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간다.
▲가다말고 스마트 폰으로 셀카를 하기도 하고...
사실 산 속에서 만나거나 연인들이 같이 걷는 모습을 보면 보기에도 좋다.
건전하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관계를 유지했음 하는 바램.
▲길 가의 단풍들이 가을 속에 서 있다.
▲올 곧은 나무들이 길 양편으로 보기좋게 키를 뽐내고 있다.
▲잠시 휴식을 위해 쉼터에 앉았다.
▲찬물내기 쉼터에서 잠시 쉬기도 하고 점심을 먹는다.
점심은 마을에서 차로 운반해 오는데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다. 양이 모라라는 사람은 그냥 더 먹을 수 있다.
점심은 마을 주민이 돌아가면서 밥을 해오는데 난 갈때마다 비빔밥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메뉴는 비빔밥인 것 같다.
비용은 6,000원 이며 출발할때 주민께 지불하면 된다.
맛은 정말 좋으며 식재료 등은 마을에서 가꾼 식재료를 사용한다.
사진에서 보시다 시피 된장국은 농가에서 만든 된장을 직접 사용하는 것 같다. 시원하고 걍된장 같은 느낌.
▲늘 산 속의 돌다리 건너는 기분은 정말 좋다. 마음이 순수해지고 그렇다.
▲샛재 성황당의 모습이다. 앞에 보이는 소나무는 대표적인 울진금강송인데 나무 중간데 노란색 페이트칠을 해두었다.
이 지역의 금강송 중에 양질의 소나무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면 언제든지 팔려 나가야 하는 운명의 금강송이다.
국가에서 점 찍어 놓아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수명은 대충 500년 이상이 된듯 하다. 해설사는 700년 이상이라는데 그 정도는 안된 것 같다.
▲샛재 성황당의 실내모습이다.
# 샛재 성황사에 대한 자료이다.---> 출처는 울진디지털 문화대전을 참고하였다. 주소는 http://uljin.grandculture.net/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 소광리 샛재에 있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성황사.
[개설]
샛재 성황사는 샛재 바로 아래에 있는 성황사로서 처음에는 부상(負商)들이,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선질꾼들이 십이령을 오가며 장사를 할 때 이들이 주도하여 제물을 준비하여 제를 지냈으며, 선질꾼들이 사라진 이후에는 빛내마을에서 제당을 관리하고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샛재 성황사 내에 걸려 있는 중수기나 성금 방명록 등을 종합해 보면 샛재 성황사는 조령 성황사·조령 성황당·조령 성황재사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1967년 문화재관리국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조치(鳥峙) 성황당(城隍堂)으로도 불렸다.
현재 샛재 성황사 내에 보관된 현판을 중심으로 연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령성황사중수기(鳥嶺城隍祠重修記)」에 따르면, 샛재 성황사는 1868년(고종 5)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처음 만들어진 것은 1868년 이전임을 알 수 있다.
행상임소(行商任所)·반수(班首)·접장(接長)·도감(都監)·본방공원(本房公員)·문서공원(文書公員)·별공원(別公員)·도집사(都執事)라는 직책이 있었다는 사실로 볼 때 십이령을 넘나들며 봉화와 울진의 장시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보부상단이 샛재 성황사 중수를 주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목수와 함께 ‘화공(畵工) 황순기(黃順基)’가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중수하면서 당신도(堂神圖)를 그려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령성황사개와시(鳥嶺城隍祠蓋瓦時)」[1878]에 따르면, 반수·접장·반수공원·본방공원·문서공원·성주도감·도집사·도공원·별공원·별임(別任)·장재(掌財)·수전유사(收錢有司)·칠읍도공원(七邑都公員)·도집사·대방(大房)·비방(俾房)이라는 직책이 나타나고 있어 이전보다 체계적인 조직을 갖춘 보부상단이 주도하여 개와(蓋瓦) 공사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88년(고종 25)에 성황사를 중수하였는데, 이를 기록한 현판에는 중수에 참여한 보부상단의 직책과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반수·접장·전함(前啣)·본방·도공원·성주도감·서기·유사(有司)와 함께 본소(本所) 및 삼장시(三場市) 소속 간부들이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94년에 성황당 당신도를 바꾸었는데, 이를 기록한 현판에 따르면 화공 이치윤(李致潤)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보부상단의 조직과 관련한 각종 직책과 이름이 열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도 샛재 성황사를 중심으로 울진·봉화 지역 보부상단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십이령(十二嶺)’이라는 표기 하에 9명의 명단을 기재하였다는 것이다.
주막을 운영하던 사람들인지 각 고갯마루마다 책임자를 배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른 지역과 비교된다.
‘동몽(童蒙)’이라 표기한 후 5명의 명단을 적었는데, 이들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조직원들이다.
1895년이나 그 이전 음력 10월 상순에 중수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조령이 십이령 중 제일 명산인데, 성황사 사우가 퇴락하여 매우 안타까이 여겨 새롭게 고치려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에 참여한 목수와 각수(刻手) 외 100명의 명단이 적혀 있다.
1916년 4월 20일에 샛재 성황사를 중수하였는데, '전공사원(前公事員)'·'전장무원(前掌務員)'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이외의 직책 명칭이 없는 것으로 보아 보부상단이 해체된 이후에 성황사를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고, 중수와 관련한 총 66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현판에 기록된 김진호(金震浩)라는 인물이 ‘재소중수발기인(齋所重修發起人)’[1919년 4월 21일 제작]
첫줄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916~1919년 사이에 조령 성황 보호금을 모았음을 알 수 있다.
1919년 재소중수발기인 모임이 있어 성금을 모았는데, 재소중수발기인으로 총 45명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1935년 4월 20일에 샛재 성황사를 중수하였는데, 성황사 내에는 성금을 기부한 사람들을 기록한 현판이 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일본인 이름을 지닌 사람 1명이 기부자 명단에 있다는 사실과 여성들이 주무와 기부자 명단에 두루 등장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중수를 주관한 간부를 ‘주무(主務)’라 하였으며 성금을 낸 사람은 총 121명이다.
이 현판에 ‘조령성황재사(鳥嶺城隍齋舍)’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샛재 성황사를 보부상단에 참여하였던 선조들을 기리는 장소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48년 성황당을 중수하였는데, 성금을 기부한 사람들을 기록한 현판이 있다.
여기에 기록된 주무 최순여(崔順汝)와 김춘화(金春化)는 『조령성황재사중수시기부인방명록(鳥嶺城隍齋舍重修峕寄附人芳名錄)』[1935]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1961년에 중수하였는데, 주도한 간부들의 직책이 주무와 유사임을 알 수 있고, 주무와 기증자를 중심으로 그 명단을 기재한 현판이 있다.
1962년에 조령성황사영정(鳥嶺城隍祠影幀)을 봉안하였다.
당시의 샛재 성황사의 당신도 봉안을 주도한 주무·유사와 함께 영정을 그린 화사 이택룡(李澤龍), 성금을 낸 사람들의 명단을 적은 현판이 있다. 현재 샛재 성황사 건물 내에 1983년 중수하는 과정에서 쓴 상량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건물은
1983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치]
샛재 성황사는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흥부역과 경상북도 봉화군을 연결하는 십이령 중 샛재에 있다.
[형태]
샛재 성황사는 지붕은 기와를 엊은 맞배지붕으로 홑처마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제당이다. 정면 입구에는 ‘조령성황사(鳥嶺城隍祠)’라 쓴 편액을 걸었으며, 성황사 내부의 제단 정면에는 ‘조령성황신위(鳥嶺城隍神位)’라 쓴 위패를 모셔 두었다.
[현황]
신목으로는 제당 동쪽에 있는 높이 20m의 들미나무가 있고, 제당 둘레에는 파손된 기와와 돌로 나지막한 돌담을 쌓았다.
제당에서 찬물내기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아래에 보부상이나 선질꾼들이 지나며 돌을 던져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돌무지가 남아 있다.
인근의 안일왕 산성과 관련하여 아밀왕이 성을 쌓기 위해 돌을 나르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제당 주변에 1842년에 세운 ‘이광전영세불망비(李光筌永世不忘碑)’가 세워져 있다. 샛재 성황사와 함께 이 불망비는 샛재가 주요 교통로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제사는 1년 중 봄과 가을에 지냈으며, 연장자를 제관으로 선정하였으며, 제비(祭費)는 위답(位畓)에서 부담하였다고 한다. 준비한 제수는 술·메·백설기·소고기·과실이었으며, 고사를 지낸 후 별신굿을 하였다고 한다.
두천리 주민들에 의하면 샛재 서낭당에서 3년에 1번 정도 10월경에 좋은 날을 받아 굿을 하였는데,
소요되는 경비는 위답(位畓)을 경작하는 사람에게 소작료를 받아서 모으고, 찬조도 받아서 하였는데, 하루 굿을 하였고,
무당 3~4명이 와서 진행하였다고 한다.
굿을 하면 인근의 빛내·장평·홈교·소광2리·찬물내기·소광1리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굿을 보러 왔으며,
선질꾼들은 여유 시간이 있으면 보고 갔으며, 일부는 시주를 하였다고 한다.
선질꾼들이 더 이상 십이령을 다니지 않으면서 샛재 성황사 운영은 인근 마을인 소광1리와 소광2리, 소광3리가 함께 지냈고, 이때 장평과 찬물내기에 거주하는 주민들도 참여하였다.
30여 년 전에 더 이상 인근 마을 모두가 유지하기 어려워 소광3리의 빛내마을에 넘겨주었다.
원래 빛내마을 서낭당이 있었으나 샛재 서낭당을 큰서낭으로 모셨는데, 지금은 빛내 서낭당은 없고
샛재 성황사 운영 또한 마을에서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
▲위의 붉은 네모칸으로 표기된 것은 연도인데 중국 연호를 사용하였다.
소화 10년으로 표기가 되어 있는데 소화연도를 서기연도로 바꿔 읽는 방법은 소화연도+ 1925년 하면 된다.
그러면 소화 10년은 서기연도로 하면 1935년이 된다.
위에 적힌 이름들은 기부가 이름인데 1935년도에 기부한 사람들의 명단이다. 특이한 것은 금액이 적혀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시골의 행사에 가면 후원금 낸 사람들 명단을 보면 이름과 금액이 적혀 있는데 여기는 없다. 무슨 뜻일까?
▲탐방객들이 진지한 모습으로 해설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숲길도 그렇지만 전국의 관광지에는 많은 해설가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어떤 관광지에서는 해설가 멋대로 소설을 써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관광객과 탐방객들을 위해 좀더 공부하고 해서 정확한 스토리텔링을 하기를 기대해 본다.
▲성황사 앞에서 울진금강송의 우수성에 대하여 잠시 해설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어른들의 아름드리 폭 보다도 더 굵다.
▲'이광전영세 불망비'/ 샛재 성황사에서 조금 내려오면 길가에 비석이 보인다. 이 지역 현령 '이광전 영세불망비' 이다.
1872년에 세워졌으며 재임기간은 1838년 1월~ 1842년 10월까지 였다.
불망비는 재임기간 동안 남긴 훌륭한 일들을 잊지 않겠다는 비석이다.
▲'이광전영세 불망비'/ 해설가가 비석에 관한 해설을 하고 있다.
▲이 지점의 나무들은 곧은 나무들로 가득차 있으며 분위기가 정말 좋다.
▲잠시 쉼터에 앉았다.
▲숲길 1구간은 돌다리가 몇 군데 있다.
손을 건네는 서로의 모습에서 인간의 순수함을 엿볼 수 있다.
▲묵묵히 걸어가는 탐방객들
▲1구간과 3구간의 분기점이다. 이곳에는 화장실도 있고 해서 잠시 쉬어간다. 도로의 오른쪽 방향으로 가면 금강송 군락지로 가게되며 왼쪽으로는 36번도로 로 가게된다. 왼쪽 길로 한참을 가서 다시 1구간의 숲길로 접어든다.
▲여기가 도로에서 1구간의 숲길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마침 포항에서 오신 부부와 같이 걷게된다.
▲발 밑으로 밟히는 낙엽소리가 초자연적 소리같다.
그 소리에 내가 가을 속으로 걸어가는듯 하다.
▲숲길에서 빠져나와 주막거리로 향한다.
▲종점에 도착후 기념사진도 찍으며..
▲주막겸 3구간 출발점인 소광리 펜션 앞 이다.
앞에 보이는 건물은 옛날 소광리 초등학교 였었는데 폐교되고 펜션으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다.
▲주막 앞의 낙엽에 가을이 깊어감을 느낄 수 있다.
▲동행하면서 벗이 된 분들. 오른쪽에 계시는 분은 산에 자주 다니신다고 한다. 부부.
▲포항에서 오신 부부.
내게 동동주 한 잔을 기꺼이 권한다.
▲주막 앞의 개천엔 시냇물이 흘러간다.
▲주막거리의 주막
▲옛날에 초등학교 였었는데 폐교와 함께 이제는 펜션과 주막거리로 사용하고 있다.
▲오늘의 산행은 끝이 났다. 원점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내버스에 올라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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