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보 제242호 울진봉평신라비 / 전시관 1층에 전시되어 있다.
- 주 소 :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521
- 문 의 :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 (전화 : 054-789-5460)
- 교통편 : 울진에서 남행, 포항에서 북행 7번국도--> 죽변교차로 진입--> 진입후 조금만 바닷가로 나오면 왼쪽에 위치
- 주변의 볼거리 : 죽변 '폭풍속으로' 드라마세트장 , 죽변등대, 죽변항
- 식당안내 : 주변의 식당이 많음
- 둘러보기 팁 :
1. 입구에서 [비석거리]---> [제1전시관에서 팜플랫 확보후]--->[제 2전시관으로 이동]--->[제 3전시관]--->
[ 모형비석 둘러보기]
2. 가족, 연인들과 역사 공부하기에 좋은 전시관
3. 전시관을 둘러보고 죽변항이나 울진방면으로 이동하면 됨
- 사진촬영 일자: 2014년 3월 26일(수), 14시~
- 촬영장소 : 울진군 죽변면 울진봉평신라비 전시관
- 촬영장비: 카메라/캐논 5D-Mark2, 렌즈/ 탐론17-35mm
울진군 죽변면에 위치한 ' 울진봉평신라비 전시관' !
봉평은 이 지역의 이름이다.
원래 이곳에서 발견된 신라비는 1988년 봉평리 논 객토작업으로 2-3개월 방치되어 있던 것을 마을 주민(권대선)이 발견하고
신고하였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었던 까닭에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나, 원래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으며
그 당시 권대선씨가 발견해서 손으로 만져보니 그림은 아닌 것 같고 돌에 작은 글씨가 많아서 신고를 하였다고 한다.
울진에 살면서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나를 찾아오는 손님과 같이 들리는 전시관이다.
입구의 비석거리에 전시된 비석들은 내가 어릴 적 살던 울진읍 새마실의 도로변에 위치해 있던 비석으로서 나중엔 울진읍에 위치한 월성공원 언덕에 모아서 관리를 해왔었다.
어릴적에는 뭔지 잘 몰랐는데 비석 앞에 만들어 놓은 간략설명과 함께 읽어보니 감회가 새롭다.
가족과 함께 혹은 연인, 친구들과 함께 방문해 역사공부 겸해서 둘러보면 좋은 곳이다.
#아래의 자료는 울진군디지털 문화대전의 자료를 참고했으며 더 많은 자료는 홈페이지( 주소: http://uljin.grandculture.net )에 가시면 됩니다.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율령비.
[개설]
울진봉평신라비는 대구에서 발행되는 일간지인 매일신문에 1988년 4월 15일자로 특종으로 보도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발견 당시 울진봉평신라비는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2리 118번지 주두원씨 소유의 논에 밑 부분의 극히 일부만을 바깥으로 드러낸 채 거꾸로 박혀 있는 상태였다. 논의 주인은 평소 농사를 짓는데 적지 않게 지장을 받고 있었으므로 때마침 같은 해 1월 20일 인근에서 객토작업을 진행하던 굴착기를 불러 돌 자체를 들어내고서 논 밖의 길가에다가 버렸다. 표면에 흙이 잔뜩 묻어 있었으므로 글자가 새겨진 비인지 어떤지를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 뒤 몇 개월이 지나는 사이에 봄비가 내려 자연히 돌에 묻은 흙이 씻겨내려 가자 글자의 일부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 돌 곁을 매일 지나다니던 마을 이장 권대선이 1988년 3월 20일 글자가 새겨진 사실을 우연히 확인하여 바로 다음 날 죽변면사무소와 울진군에 신고하였다. 울진군 공보실 직원들이 즉시 현장에 파견되었으나 내용을 잘 알 수가 없어 일단 그대로 놓아두었다.
1988년 3월 26일에는 울진군의 관광문화재계장 이규상이 다시 현장에 출장하여 알 만한 몇몇 글자를 대충 읽고서는 그것이 예사롭지 않은 고비임을 짐작하여 3월 29일 경북도청에 들러 구두로 신고하였다. 글자를 세로 줄로 읽어야 함에도 가로로 잘못 읽어 조선시대의 비로 간주하는 등 약간의 촌극도 벌어졌다. 4월 7일에는 향토사가 윤현수가 울진군청의 도움을 받아 비를 처음으로 탁본하였다. 울진군청은 이때 파악된 내용을 토대로 경상북도에 서면으로 정식 보고하였다.
그와 같은 정보를 입수한 대구 매일신문의 문화부기자 박진용은 곧장 현장으로 달려가 비의 출현 사실을 독점 취재하여 4월 15일자로 특종 보도하였다. 당시 신문의 1면 거의 전부를 울진봉평신라비 관련 기사로 메울 정도로 크게 다루었다. 신문사에서는 비밀이 자칫 새어나갈까 염려하여 미리 기사를 작성하여 편집부에 넘기고 나서 전문연구자들에게 알렸다. 전문가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고 비문을 멋대로 판독하고 내용을 해석한 탓에 처음 보도된 기사에는 잘못되거나 부정확한 면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수정 보완하여 다시 보도할 필요성이 제기되자 비로소 대구 시내 대학에 근무하는 교수들에게 비의 출현 사실을 통보해서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울진봉평신라비가 발견되기 꼭 1년 전인 1987년 대구를 중심으로 결성된 한국고대사연구회라는 학회에 소속한 연구자들이 여러 사람 연락을 받고 1988년 4월 16일 비문을 조사하고자 갔다. 현장에서 비문을 정식으로 탁본도 하고 글자를 하나하나 읽으면서 전체적인 내용과 의미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날 매일신문을 통하여 재차 보도되었다. 그 뒤 각종 매스컴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전국적으로 비의 출현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굴착기로 비를 들어내는 작업 과정에서 비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으나, 1988년 5월 5일 한국고대사연구회 주최로 비문을 다시 정밀 판독할 때에 참관한 대구대학교 학생에 의하여 비편이 발견되어 완형을 갖추게 되었다.
울진봉평신라비가 발견된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조사가 계속하여 이루어졌다. 특히 5월 5일에 떨어져 나간 비편이 발견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정식으로 비가 출토된 위치를 확인하는 발굴 작업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비좌(碑座)가 확인되지 않아 비가 원래 위치하였던 정확한 장소를 밝혀내지는 못하였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이동한 사실만을 확인하였을 따름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1988년 8월에 비의 모형을 만들어 활용할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정밀한 판독과 분석을 통하여 울진봉평신라비가 삼국시대 신라의 비로 525년 세워진 것으로서 당시 신라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비임이 드러났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과는 상당 부분 다르거나 아니면 전혀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국보급의 문화재임이 틀림없다고 판단되어 지정 절차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그를 위해서는 먼저 정식 학술회의를 열어 비문의 내용을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제기되었다.
먼저 한국고대사연구회[현재의 한국고대사학회] 주관 아래 학술회의를 갖기로 하였다. 그 결과 1988년 7월 22일에서 23일 이틀간에 걸쳐 대구의 계명대학교에서 비문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첫 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학술회의는 대우재단과 유진기념관의 도움을 받아서 진행되었으며 수백 명의 연구자가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학술회의의 결과는 한국고대사연구회가 발행하는 기관지인 『한국고대사연구』 2호를 특집호로 꾸며 1989년 5월 간행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학술회의를 열면서 비의 명칭을 잠정적으로 울진봉평신라비라 부르기로 하였다. 그 뒤 학술회의를 거치면서 많은 논란이 뒤따랐지만 처음 명칭 그대로를 사용하기로 결론이 내려졌고 마침내 국보 242호로 지정되었다.
[건립경위]
524년(법흥왕 11) 울진 지역에서 신라에 대한 모종의 반란 사태가 발생하여 경주와 삼척의 대군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책임자에게 장 60대와 100대를 치고 얼룩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이러한 일이 다시 발생하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을 적어 석비를 세웠다.
[형태]
울진봉평신라비의 크기는 높이가 204㎝, 글자가 새겨진 부분 위쪽 너비는 32㎝, 가운데 너비 36㎝, 아래쪽 너비 54.5㎝로 전체 모양은 사다리꼴에 가까운 부정형으로 414년(장수왕 2)에 세운 광개토대왕비와 유사하며, 자연석을 거의 그대로 이용한 것은 삼국시대에 제작된 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금석문]
울진봉평신라비가 건립된 연대는 첫머리의 간지인 갑진년(甲辰年)과 함께 모즉지매금왕, 사부지갈문왕 등의 인명으로 미루어 신라 법흥왕(法興王) 11년인 524년이 확실하다. 당시까지 알려진 신라의 비문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울진봉평신라비 비문은 자연석 화강암에 한 면[앞면]만을 다듬어 글자를 새겼는데, 구성은 전체 10행으로 1행 31자, 2행 42자, 3행 41자, 4행 42자, 5행 25자, 6행 46자, 7행 45자, 8행 44자, 9행 40자, 10행 42자로 전체 글자 수는 398자이다.
전체 10행으로 이루어졌으며 글자 사이의 간격도 일정하지가 않으며, 각 행의 글자의 수는 같지가 않다. 가장 많은 행은 제6행으로 46자에 달하며, 적은 곳은 25자의 5행으로 전체 글자 수는 398자이다. 공교롭게도 이 수치는 비문의 마지막의 “삼백구십팔(三百九十八)”이라는 명문과 일치한다. 서체는 당시의 일반적인 양상과 비슷하게 예서에서 해서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것으로서 읽기 어려운 글자는 별로 많지가 않다. 다만, 마모가 약간 진행되거나 이체자(異體字)를 사용한 몇몇 글자는 뚜렷하게 확인하기 곤란하다. 특히 중요한 대목은 불명확한 글자가 많아 내용 파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비문의 전체 내용은 524년 정월 국왕인 법흥왕과 그의 동생인 사부지갈문왕을 비롯한 14인이 합의하여 어떤 중대한 사항을 결정하고 그를 집행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결정이 내려지기 바로 직전 해인 523년 비가 세워진 곳으로 추정되는 거벌모라 지역에 대군을 동원해야 할 어떤 사태가 발발하고 그를 해결하고 난 뒤 이 지역을 대상으로 책임을 물어 사후 조치를 취하고 나아가 사건에 직접 연루된 유력자를 처벌하여 그 사실을 영구히 기록하여 알림으로써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려는 목적에서 비를 세운 것이다. 비의 성격을 둘러싸고 여러 견해가 제시되어 있으나, 율령과 관련되는 내용을 담은 율령비로 보고 있다.
국왕을 비롯한 여러 신하가 합의하여 중요한 결정을 한 점, 국왕도 부명을 칭하고 있는 점, 노인법이란 율령의 편목을 시행하고 있는 점을 비롯하여 신라육부, 장형의 존재 등은 신라사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주요한 요소들이다. 이를 매개로 그동안 논란되어 온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나아가 5~6세기 신라사의 내용을 한층 풍부하게 서술할 수 있게 된 데에 큰 의의가 있다.
[의의와 평가]
울진봉평신라비가 발견됨으로 인하여 고대사 연구가 활성화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즉, ‘신라육부(新羅六部)’라는 글자가 나오므로 인해 6세기 초 이전에 이미 신라에 6부가 성립되었음을 확인하게 되었으며, 법흥왕이 탁부(啄部)로, 그 동생인 사부지갈문왕(徙夫智葛文王)은 사탁부(沙啄部) 소속으로 되어 있어서 형제가 각기 다른 부(部)를 관칭(冠稱)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또한 노인법과 죄인을 처벌하는 장형의 존재는 520년(법흥왕 7)에 율령 제도가 성문법으로서 실제로 행하여졌음을 증명해 주는 등 『삼국사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증명해 주었다. 이 밖에도 부를 초월하지 못한 왕권의 한계, 당시 신라의 영역, 관료 제도, 지방 통치 조직과 촌락 구조, 의식 행사 양상 등의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 7번국도에서 죽변쪽으로 들어가면서 오른쪽 방면에 위치하고 있다.
▲ 정면에서 본 모습
▲ 정면의 모습이다. 봄비가 와서 입구가 비에 젖어있다.
▲ 주차장이 상당히 넓다. 봄이 되니 진달래도 피었다.
▲ 인라인스케이트장 / 이 스케이트장은 건설 당시 제용도로 사용하려고 했었는데 그동안 용도에 맞게 사용된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왼쪽에 보이는 야외음악당도 별로 사용하지 않고 수 년을 보냈다.
개인적인 생각은 현재 울진 박물관이 없는데 여기에 울진 박물관을 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울진군 박물관이 생길 때도 된 것 같다.
▲ 입구에 조성된 비석거리에 대한 설명
▲ 정면에서 한 번 본다. 건물이 주변의 자연경관과 잘 어울리게 디자인된 것 같다.
▲ 입구에 늘어선 비석거리 / 이 비석은 맨처음 울진군 울진읍 읍내리 1리(속칭 새마실)의 도로변에 있다가 울진초등학교 뒤편의 월성공원 언덕에 있다가 전시관 개관에 맞춰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옛날 현령들과 지역 유지분들의 공적비이다
▲ 비석이 오래되어 이끼가 흘러간 세월을 말해준다.
▲ 백비/ 비문이 전혀없다.
마침 여기 백비에 관해서 현장에 근무하는 문화해설사 '김성준'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야기는 이렇다.
전라도 장성군에 있는 ' 박수량 백비'와 같은 개념의 비가 아닌가 한다.
아마도 울진에서도 그 당시 박수량의 백비와 같이 살아생전에 훌륭한 일을 하고도 후손에 누가 될까 아무런 비문도 없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말을 들으니 한결 이해가 빨리 오는데 그 근거는 없는듯 하다.
# 박수량의 백비 (아래의 자료는 장성군청 홈페이지의 자료를 참고하였다.)
아곡 박수량 선생은 25세에 등과하여 64세까지 39년간을 관직에 있으면서 오직 공직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했을 뿐 명예와 재물에는 아무런 욕심이 없었다.
명종은 박수량 선생이 너무 청백하다는 말을 듣고 암행어사를 보내 그의 생활을 알아 보았더니 생계를 겨우 연명할 정도이며, 집은 낡아서 비가 샐 정도라고 하였다.
박수량 선생은 1554년(명종 9년) 1월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고향에 장사를 지내되 묘를 너무 크게 하지도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 고 유언을 했다. 명종께서는 선생의 부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시며 사람을 보내 조의를 표하고, 판서까지 지낸 분이 운상비가 없어 고향으로 가기가 어렵다는 말을 듣고는 비용을 마련해 주고 예장을 명하였다.
그리고 서해 바다의 돌을 골라 비를 하사하였는데, 비문을 새기다가 선생의 고결한 삶에 자칫 누를 끼칠까 염려되어 그대로 묘 앞에 비문이 없는 돌을 세우니 이 비가 유명한 「白碑」이다.
그 뒤 박수량 선생은 1806년(순조 11년) 2월 정혜(貞惠)라는 시호를 받았다. 장성군은 박수량 선생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하여 군청광장에 모형 백비를 세워 현재의 공직자의 표상으로 삼고 있다.
▲ 철비
이 철비에 대해서도 김성준 선생의 이야기가 귀를 쏭긋케 한다.
이 철비의 제작을 봐서는 울진에서도 옛날에 철이 생산되었지 않나 추측하며 운송하기에 돌 보다는 가볍고 비문 제작도 용이한 잇점이 있었겠다 한다.
아쉬운 점은 철비에 세월이 지남과 동시에 녹이 자꾸 선다는 점이다. 대책을 세워야 될 것 같다.
각 비석 앞에 간략설명이 있어 이해하기에 쉽다.
▲ 관람 시간이 나와있다. 겨울철에는 문닫는 시간이 1시간 빠르다.
휴관일은 매주 월요일. 울진군의 남부도서관(후포), 죽변면 도서관(죽변면)의 휴관일과 동일하다.
일요일의 관람객들 때문일 것이다.
▲ 입구에 들어서니 넓는 복도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앞에 보이는 데스크에 가이드가 늘 찾아오는 손님을 안내한다.
▲ 복도의 한쪽엔 이렇게 쉼터가 있다.
▲ 왼쪽으로 들어가는 입구인데 제1전시실, 제2전시실이다. 여기에 울진봉평신라비가 있다.
▲ 제1전시실 입구/ 울진봉평신라비에 관한 각종 자료들이 벽면에 가득차 있다.
▲ 울진봉평신라비 전시실이다. 앞에 보이는 것이 울진봉평신라비이며 어딘지 모르게 근엄한 느낌이 들며 그 옛날 선조들의 숨소리를 한 번 느껴보려고 노력해 보지만 세월이 너무 오래된 탓 일까?
암튼 자료를 한 번 자세히 읽어보고 싶다. 일전에 몇 번 왔었는데 자료는 대충 읽어봤었다.
(원래 여기는 사진촬영 금지이지만 김성준 문화해설사의 동의를 얻고 사진 한 컷을 촬영했다.)
▲ ' 김성준' 울진문화관광 해설사로 부터 신라비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벽면에 간략한 설명이 되어있다.
524년.1,500여년 전의 이야기들이 이렇게 씌여있다. 그때 울진지역의 이름이 '거벌모라' 였다는 이야기와 석비의 내용에 관한 이야기들이 적혀있다. 옛날 울진의 중심지가 여기였다고 한다.
▲ 신라비의 가치에 대한 설명/ 신라시대의 생활상에 관한 주요한 자료를 제공한다고 한다. 그래서 국보까지 되었나 보다.
울진에 국보가 있다는 것 자체는 자랑스런 이야기가 아닐까?
울진에 국보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국보 181호 '장양수 홍패 '이며
이 문서는 고려 희종 원년(1205)에 진사시에 급제한 장양수에게 내린 교지이다.
▲ 울진봉평신라비의 탁본이다.
▲ 비문의 원본을 벽면에 붙여놓았다. 그 옆에 한글로 표기를 해두었는데 아무리 읽어봐도 이해가 잘 안된다.
오른쪽 밑에서 세 번째 글자옆에 ? 마크는 발견하고 글자가 확실치 않아서 그렇게 해놓은 것 같다.
▲ 비가 화강암으로 되어있으며 비석의 개요를 간략히 설명해 두었다.
▲ 신라비에 나오는 이름들을 적어두었다. 그 당시에는 '성'의 개념이 없었는듯 하다.
요즘 처럼 최, 이, 박씨의 성이 아니것이 눈에 띈다.
▲ 얼룩소를 잡아서 재물로 바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 죄를 지은 사람에게 내린 형벌
▲ 비문을 현대말로 풀이를 해놓았다.
▲ 울진봉평신라비의 연대를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설명해 두었다.
▲ 신라비의 연표에 대하여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표기를 해두었다.
▲ 제1전시실에서 제 2전시실에 이동하면서
▲ 제2전시실로 들어가는 입구
▲ 제2전시실의 모습 /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각종 비석의 모형본을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사택지적당 탑비
▲ 임신서기석
▲ 제 2전시실의 모습
▲ 석비에 관한 설명을 해두었는데 읽어보니 전부가 새롭다.
석비는 간략히 말해 고대인이 우리 현대인에게 직접 띄운 편지라는 말이 피부에 와 닿는다.
▲ 비에 관한 설명
▲ 울진군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문화유산들. 이중에 두 개의 국보가 울진에 있다.
한 군데 한 군데 찾아봐야겠다.
▲ 울진군의 변천사에 대해 설명을 해두었다.
신라시대에는 울진이라는 말 대신 ' 울진지역'으로 불리어졌나 보다.
▲ 삼국사기에는 102년에 울진과 삼척지역이 신라영역인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한다.
▲ 제2전시실의 내부모습 / 중간에 쉴 수 있는 장소도 마련되어 있다.
▲ 2전시실을 나와 3전시실로 가는 길이다.
▲ 3전시실의 입구
▲ 3전시실로 들어가는 입구
▲ 제3전시실에는고구려, 신라, 백제등의 각 시대별 비석의 특징에 대해 설명되어져 있다.
▲ 제 3전시실의 전체모습
▲ 제 3전시실을 나와서 체험공간으로 이동하면 된다.
▲ 체험공간에서 본 실외의 모형비석들
▲ 체험공간의 체험도구들/ 몇 가지 되지 않으며 개관후 수 년동안 사용해온 까닭에 권태롭고 단순한 느낌이 들며 가끔은 비석과 관련해 새로운 공간으로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 스트레칭 체험공간
▲ 모형비석으로 가는 길
▲ 모형비석들에 대한 설명과 배치도
▲ 모형비석군
▲ 모형비석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비문이 읽기에 힘이든다. 글자도 참 어렵기도 하며..........
▲ 이 비석이 눈에 띈다. 모양이 일반비와 차이가 있어 한참을 보니 ' 이차돈 순교비'이다. 불교의 공인을 위해 순교한 이차돈. 역사시간엔 순교시 하얀피가 나왔다고 배웠는데...과연 하얀피가 나왔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만큼 불교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는 의미가 아닐까도 싶다.
▲ 이차돈 순교비의 설명
▲ 그 유명한 광개토왕비의 모형이다.
▲ 크기도 상당히 크며 모형비석중에 크기가 가장 크다.
▲ 비문인데 몇 자 밖에 읽지 못하겠다.
▲ 광개토왕비에 대한 설명
▲ 참고로 2011년 가을. 제가 보관하고 있는 사진을 같이 올려드립니다. 방문한 관광객들이며 마침 울진군문화관광해설사로 일하고 있는 '주금화'씨가 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앞에 보이는 것이 광개토대왕비의 모형입니다.
▲ 참고로 2011년 가을. 제가 보관하고 있는 사진을 같이 올려드립니다. 방문한 관광객들이며 마침 울진군문화관광해설사로 일하고 있는 '김신애'씨가 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제1 전시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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