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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여행,트레킹/해외(유럽)

알비노의 유럽여행 6일차( 2015년 9월 30일,수)/ 비운의 도시 폼페이,쏘렌토, 카프리섬,나폴리,

폼페이의 최후를 맞게한 베수비오 산이다.

 


 유럽여행 6일차( 2015년 9월 30일,수)/ 비운의 도시 폼페이,쏘렌토, 카프리섬,나폴리

 

폼페이!
베수비오 화산으로 인한 도시가 멸망된 그 이름도 유명한 '폼페이의 최후'.

화산재로 뒤덮힌 도시를 발굴한  자리,  그 자리에서 난 할 말을 잊었다. 그 옛날 기억속에 있는 영화 ' 폼페이의 최후'를
머릿속에서 꺼집어내 봤지만 영화의 내용과는 사뭇 다른 현장의 모습이다.

이 큰 도시가 화산으로 인해 멸망했다. 군데 군데 발굴한 화석이 된 사람의 시체와 동물의 모습, 그리고 상상을 초월한 복구된
도시의 모습과 푹패인 돌길 위의 마차 바퀴자국.
2,000년 전의 일이 피부에 와 닿는듯 했다. 그 당시에 살아보지 못했지만 영화에서나 본 비슷한 장면들이 폼페이를 둘러보는 동안 내내 내 상상력을 자극했다.

 

복구되었다고 하지만 거의 폐허의 모습인 이 도시를 보며 그 뒤로 자리잡은 베수비오 산 !
비운을 불러 일으킨 그 산을 한참 바라보았다.

한국으로 이야기하면 그냥 민둥산 같은 그 젊잖은 산에서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연기가 피고 화산재가 쏟아져 얼마되지 않는 시간에 화려했던 그 당시의 폼페이는 멸망을 하고 말았다.

폼페이는 지금도 복구와 발굴이 진행 중이였다. 많은 관광객들이 분비고 좀 더 세밀하게 보려고 했지만 역시 시간이 부족했고

빈약한 폼페이에 대한 역사 상식과 더불어 나중에 귀국하면 폼페이에 관한 자세한 책들을 읽어보겠노라 다짐했다.

 

  '폼페이'를 지나 중학교 음악책에도 나오는 '돌아오라 쏘렌토'. 그  쏘렌토를 거쳐 부자들의 요양섬 카프리 섬으로 열차를 타고
   이동한다.

  '쏘렌토'의 풍경은 그냐말로 스위스 처럼 보기좋은 도시가 아니라 그냥 고풍스런 전형적인 유럽의 마을이었다.

 

 

   중학교 음악책에 나오는 쏘렌토! 그 쏘렌토  위를 걷고 있노라니 꿈만 같고 뒷골목을 바라보니 쓴 선술집에서 현지인들과 같이
   술도 한 잔 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오르지만 어쩐다?

 

 

    쏘렌토를 거쳐 카프리 섬으로 이동하는 배에 승선한다. 넓은 바다가 내가 사는 울진의 바다와 대비가 된다.

    내가 사는 울진의 바다도 보기에 좋은데 늘 봐와서 그런가? 어쩐지 이국에서의 바다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쏘렌토에서 가프리섬으로 가는 바다는 평온하며 가끔 윈더서핑과 요트를 하는 젊은 이들의 젊음이 부럽다.
    순간 이런 곳에서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인간이란 또한 이런 곳에 살면 사는대로 어려움과 편함이 항상 공존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길지도 짧지도 않게  약 6개월 정도만 살아봤으면 했다.

    유럽여행을 26일동안 하면서 느낀 것은 길지도 않게 약 6개월만 군데군데서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가능할까?

    카프리섬을 처음 보는 순간, 이국에서의 아름다움 때문이랄까 아니면 유명한 휴양지라서 그런지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다.

    카프리섬에서 가장 높은 산은 '솔라로 산'인데 높이가 589m 이다.

    선착장에서 부터 바로 리프트를 타고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 중턱까지 버스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버스는 대형버스가 아니고 길이 위험해서 작은 미니버스이며 편도로 운행이 된다.

   운전자끼리 무선통화로  연락을 하며 리프트를 타고 정상까지 올라가는 스릴과 조망은 정말 훌륭한 볼거리이다.

 

   틀히 리프트를 타고 올라갈때와 내려올 때의 조망은 탁틔인 바다와 발 아래 펼쳐지는 카프리 섬의 집들. 별장들....
   과히 탄성이 나올만 하다.

   이 섬은 처음에는 그리스의 식민지였다고 한다. 그리고 로마제국 초기에는 황제들의 휴양지로도 이용이 되었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 티베리우스 황제 등은 이곳에 여러 채의 별장을 지었고 거주를 했다고 한다.

   카프리 섬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휴양지 가운데 하나이며 특히 아름다운 경치와 온화한 기후로 유명하다.

   산 정상에는 작은 카페가 있으며 산 정상에서 둘레를 바라보는 즐거움과 포토존이 따로 없다.
   그냥 셔트를 누르면 그림이 되는 곳이다.

   조심할 점은 리프트를 탈때 가이드가 안내를 해주는대로 박자를 잘 맞추어 타야한다. 부상의 위험도 있다.

 

  

  

 

 

 폼페이(Pompeii)는 고대 로마의 도시이다.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주 나폴리 인근으로, 현재 행정 구역으로는 폼페이 코무네에 속한다.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산 분화로 인근의 헤르쿨라네움 등과 함께 화산재와 분석에 묻혀 파괴되었다.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이자,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였다.
  
-폼페이 발굴

폼페이 발굴은 1549년 수로공사중에 유적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1748년 발굴로 광장, 목욕탕, 원형극장, 약국 유적지등이 발견되었으며, 현재 3분의 2가 발굴되었다. 따라서 발굴이 완료된다면 로마 미술의 최고걸작으로 평가받는 '큐피드 벽화'와 '춤추는 폰의 동상'등의 수준높은 문화재들이 더욱 많이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2010년 11월 6일, '검투사의 집'이 폭우로 인해 붕괴되었다

 

- 화산 폭발로 멸망한 도시

79년 8월 24일 정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연안에 우뚝 솟아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돌연 폭발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검은 구름이 분출되면서 화산이 분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화산은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화산분출물을 뿜어내면서 인근 도시로 쏟아져내렸다.

 

나폴리 남동부에 자리잡고 있던 폼페이는 이 화산 폭발로 커다란 피해를 입고 소멸한 도시 중 하나다. 하늘에서 비오듯 쏟아져내리는 엄청난 양의 흙과 돌은 순식간에 폼페이를 뒤덮어버렸다. 운 좋게 도망친 사람도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늦은 사람들은 지상을 뒤덮은 고온 가스와 열구름에 질식하거나 뜨거운 열에 타 죽었다. 이 폭발로 당시 폼페이 인구의 약 10퍼센트인 약 2,000명이 도시와 운명을 함께 했다고 한다.

 

당시 폼페이는 B.C. 89년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 철저하게 로마화가 진행된 도시였으며, 로마의 상류계급이 별장을 건설했던 휴양지이기도 했다. 화산이 폭발하기 전인 63년 2월에 대지진이 일어났지만 도시는 착실하게 재건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6년 뒤 도시 전체는 화산재 밑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폼페이 멸망의 참극에 대해서는 당시 로마의 정치가 소(小)플리니우스가 역사가 타키투스에서 보낸 편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소플리니우스는 베수비오 화산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나폴리만 입구 미네눔에 머물고 있었다. 폭발 당일 소플리니우스의 어머니가 베수비오 화산 상공에 이상한 모양의 거대한 구름이 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소(小)플리니우스에게 알려주었다. 소(小)플리니우스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고 재빨리 어머니와 함께 먼 곳으로 피난을 떠났다. 후에 그는 편지 속에서 그때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그리고 그의 숙부인 대플리니우스는 당시 함대의 선장으로 선박을 타고 나가 구조 활동을 펼쳤지만 독성이 강한 화산 가스에 질식해 그만 죽고 말았다.

 

당시 로마 황제 티투스는 폼페이 참극에 대해 보고를 받고 곧바로 구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피해가 너무나 커서 화산 분출물에 의해 도시는 완전히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로마 황제까지 나서서 폼페이의 몰락을 막아보려 했지만 폼페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로마의 도시

역사에 퇴장했던 폼페이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592년이었다. 폼페이 위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건물과 회화 작품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런 우연한 계기로 폼페이의 소재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본격적인 발굴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1748년에는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독점 사업으로 폼페이에 대한 발굴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발굴은 약탈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름다운 출토품만이 중요하게 취급될 뿐 나머지 유물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또 모자이크나 벽화 같은 미술품들도 충분한 조사도 없이 모조리 프랑스 왕궁으로 실려가버렸다.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폼페이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국왕 빅토르 에마뉴엘 2세는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를 발굴대장으로 임명하고, 조직적인 발굴을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유적에 대한 구획 정리와 함께 본격적인 수리와 보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발굴단은 유적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넣어 당시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후에도 폼페이 발굴은 계속되어 현재는 도시의 약 4/5가 모습을 드러낸 상태이다. 이곳에서 나온 많은 출토품들은 현재 나폴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최후

타락한 도시의 신의 벌이라고 불리는 폼페이의 최후는 AD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폼페이가 멸망하는 엄청난 재앙이 발생하여서 약 2천여 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고 로마의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던 광장과 대규모의 호화스러운 건물과 극장, 상가,그리고 당시의 최고의 설비를 자랑하던 스타비안 목욕탕이 화산재에 묻히고 말았다. 화산 폭발 후 조사차 이곳을 방문한 학자 플리니우스도 사고로 목숨을 잃었으며 피해상황이 하도 엄청나서 로마는 폼페이의 발굴 및 재건에 손도 못 댔고 일확 천금을 노리는 도굴꾼만 득실대었다고 한다.

 

출처
저자: 위키백과 
URL: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ED%8F%BC%ED%8E%98%EC%9D%B4&oldid=15392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