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진군 기성면 구산항 부근
2014년 1월 15일(수), 울진군 기성면 구산항 부근으로 나갔다.
울진군 기성면 구산항은 울진군에서도 남부지역에 위치를 하며 동해안 바닷가를 배경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겨울바람이 매섭다.
멀리서 바다물을 타고 오는 겨울바람은 차고 세차지만 그 찬바람 속에서도 낭만은 흐른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간 어촌마을엔 수 십년 동안 마을을 지키고 온 연세드신 어른들 만이 그물을 손질하며
어쩜 한적한 느낌마져들고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동남아에서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어부의 손이 되어 움직인다.
구산항 부근엔 볼 만한 울진 문화재들이 몇 개 있다.
[백암공 김제선생의 비],[ 대풍헌], [운암서원],[평해북천교비]등이다.
평소에 차를 타고 지나가도 잘 모르는 이런 문화재에 얽힌 이야기를 읽어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온고 지신 [溫故知新] !
옛것을 익히고 배워 새로운 것을 아는 것.
현대를 살아가는 나는 현세를 통해 새로운 것을 알려고 하는 나는 반성을 해본다.
인간사 옛날이나 현재나 모두 사는 것은 똑 같다. 문명의 발달의 정도가 달라서 그렇지 인간의 삶의 역사, 특히 인간사이에 벌어지는
감정들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점에서
나는 현재의 눈으로 옛 것을 보는 법을 배워야겠다.
산 위에 있는 작은 기성비행장에 소형비행기가 잠자리 처럼 뜨고 내린다.
# 볼거리
1. 구산항구를 비롯한 어촌마을의 풍경 및 구판장 그리고 항구
2. 주변의 볼거리[백암공 김제선생의 비],[ 대풍헌], [운암서원],[평해북천교비]
# 즐길거리
1.구산해수욕장
# 백암공 김제선생
백암 김제 선생(충숙왕 전기말=1330~1392)
김제의 호는 백암 시호는 충개이니 예의판서 원로의 아들이요 농암 주의 형이다. 선산인으로 고려개국통합삼한벽상 2등공신
이며 태조때 문하시중을 역임한 순충공 김선궁의 14세손이다.
선생은 고려말에 평해군사로 재임중 이성계가 고려를 멸하고 새왕조를 개국하자 그해 12월 군청벽에 해상시를 지어 붙인후
바다로 나아가 통곡하며 이름을 제해라 고치고 미리 준비한 갈대삿갓을 쓰고 작은배에 올라 바다로 들어간후 그 마친
바를 알지 못한다. 이(도해시)에 이르기를 "배를 불러 동쪽 노중련의 나룻터를 묻노라.
오백년 다 한 왕조 초개같은 이신하, 외로운 내 영혼 죽지 않는다면 원하건대 저 붉은 해 따라가 공양왕이 계시는 구천지제를 비추리라(國王은 九天의 中間위치에 존재하므로 그곳을 中垠이라함) 옛 제나라 노중련이 나라가 망할 때 바다에 숨은 충절과 같이 선생
또한 신왕조에 불복하여 동해로 자진하셨음이 사실로 드러난다. 그리고 배를 타시던 바닷가 암벽에 해상시가 음각되었는데 현 구산해수욕장 입구이다. 평해해변의 인사들은 이일을 이야기하면서 군재의 충절에 강개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어 일화로 전승해 왔다. 이와같이 선대의 항절사적이 관부에 알려져 불이익을 당할까 우려한 후손들은 백암공의 사적을 숨기니 미명(未明)해오다가 400여 년 후에 조정에서 전조의 충신을 포창하고 공인하자 후손들은 그 때에야 천양에 힘쓰니 평해해변에 암각된 도해시와 개성의 72충신비 및 해동시보의 기록을찾아내었다. 조정에서는 아우인 농암공의 불사이군의
행적과 백암공의 도해충절을 찬양하니 정조 임금은 두분 형제야 말로 진동방의 백이숙제라 감탄하였고 조야의 선비들은 이제 이후 수천년 역사에 동방에서 처음 본형제의 충혼을 한뜻으로 찬송하였다. 정조 22년(1798) 9월 20일 조정은 좌승지 이익운을 보내어 안동의쌍절사에서 (충개)라는 시호를 내리고 24일 평해의해변에서 초유제를 지내도록 사제문을 내렸다.
무오년 가을 제사한 자리에 치제단이 세워지고 후손들이 표석을 세우니 유림과 협력하여 단각을 지었다.
평해유림의 성력으로 충절사와 운암서원을 세우고 백암선생의 절의를 숭앙하며 해마다 춘추로 충절사와 해단각에 세사하여 오늘에 이른다. 선생의 사적은 영의정 남공철공이 지은 (고려명신전)에 12인을 선하였는데 형제가 나란히
올라있고 또 임두문재실록의 십의에도 첫째와 두 번째로올라있다. 그리고 두문동제현실기인(규장각 충렬록)의 74인
중에도 형제가 다같이 올라 있으나 이 책들은 모두 고려말과 조선국초의 자료를 집록한 것이고 이후로 영조실록 74권과
승정원일기(1074) 책(1751)에 있고 영조께서 세운 부조현의 비문에는 백암, 농암 형제가 두문동 72현에 새겨있다.
그 내용은 규장각 충렬록과 거의 같다. "내 영혼이 죽지않는다면 저 붉은 해 따라가 공양왕이 계시는 구천지제를
비추리라"고 읊조리고 이성계의 개국에 불복하여 동해에 자진한 선생의 도해시는 고려 왕조를 보전하지 못한 신하의
의리로 왕조와 운명을 같이 하려고 한 충혼을 드러낸 것이다. 고려말의 충신을 상징하는 두문동 72현중에는 살아서 자정불기한 인사가 대다수이지만 신왕조의 건설에 협력을 거부하여 단심가를 부르고 폭력에 희생당한 포은 정몽주 선생과 백암공의 도해충절이야 어찌 저 대다수 인사들에 뒤지랴! 그리고 전고대방이나 이 책의 근거가 되고있는 화해사전 등에 두분의 사적을 찾아 볼 수 없음은
다 대의에 기준을 두어 선정한 공인사적이라 믿을 사람은 거기레 관련된 사람 말고는 없을 것이다.
더욱 해괴한 것은 지난 92년에 간행한 숭의 전사의 내용을 보면 화해서전의
두문동 72현록에 쓰인 조안경 선생의 사적에 그가 벽란진을
건너며 지었다는 7언시 4연은 백암공의 도해시다. 충신의상징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72현의 주체가 남의 글을 훔쳐서 조작한 공적으로 결정할수 없으니 이 책을 편집한 왕준항씨는 그 연유를 밝힐 책임이 있는 것이다.
선생의 태생지는 선산군 옥성면 주아리이다. 어릴때는 아우인 농암공과 이곳에서 성장하였지만 아버님께서
일찍이 경직에 나아가시어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의 침공으로 어가가 안동에 피란할 때 환관으로 호종하는 등
왕정에 이바지하심에 두분 형제는 개경에서 뜻을 세우고 당대의 대학자 불훤재 신현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관계에 나아가셨음이다. 공신 가문인 당숙 화의군이 화를 당했으나 백암 농암 형제는 꿋꿋하게 발신하였고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서로 행하시니 동방의 백이 숙제로 추앙을 받아 고려공신의 후예로서 최후를 마쳤음이다.
- 선산(일선)김씨 대종회 종사편집회의 자료임 / 홈페이지 http://www.sunsankim.org/-
▲울진군 기성면 구산리 구상항과 구산해수욕장 부근의 울진군 문화재 위치도
▲ 백암공 김제선생의 시비이다.
김제선생이 평해군수로 재직할 때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이름을 제해(齊海)로 바꾸었는데, 동해로 뛰어든 제나라 노중련(魯仲連)의 절개를 따른다는 뜻이다. 그러고는 시 한 수를 써서 벽에 걸어둔 채 행방을 감추었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해의 저 배야 노중련의 나루터가 어디냐. 오백년 고려조의 한 사람 신하로다. 외로운 나의 영혼 죽지 않고 있다면 붉은 해 따라 단심을 비추고 싶구려.”
▲시비가 벽에 박혀있다.
원래는 여기가 위치가 아니였는데 구산항 공사를 인해 여기로 이동을 했다고 한다.
▲시비 앞으로는 훤히 바다가 보인다.
▲ 구산항으로 오다 해안도로에서 작은 등대를 본다. 은빛 파도가 하얀 비늘을 내놓는다.
▲울진군의 해변에도 일본의 쓰나미 재낭으로 인해 지진해일 대피안내표지판을 모두 설치해 두었다.
살다보면 실제상황이 일어났을때 안내도가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 파도가 제법 세다.
▲작은 항구로 가는 해안도로/ 이 길을 계속가면 구산해수욕장이 나온다.
여름에 해수욕장에 해수욕을 하는 것도 즐거운 일 이지만 이렇게 한적한 시간에 어촌마을을 한 번 둘러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 도로변에서 어부의 부인들이 그물을 손질하고 있다. 과연 저 그물을 손 보면서 무슨 생각들 할까?
자식생각과 남편생각이 대부문이 아닐까 짐작을 해본다.
▲구산항의 모습이다. 배들이 그리 크지 않다.
▲ 고등어를 자르고 있다. 문어잡이의 미끼로 쓰인다고 한다. 저렇게 잘라서 아래 사진의 하이얀 통 안에 집어넣어서 문어잡이 통에
집어넣고 바다에 던져지고 문어를 잡는다.
▲저걸로 몇 마리를 잡을까? 문어를 잡자기 먹고 싶네요.~
▲ 구산항에서 일전에 이 횟집에서 회를 먹어봤는데 잔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횟집으로서 순자연산 회만을 취급하는 집이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집 같지만 쉬엄쉬엄 소문만을 듣고 찾아오는 횟집이다.
강추~~! 해 드립니다. 상차림에서는 군더거리 반찬은 거의 없습니다. 미역과 알찬 기본 밑반찬만 올라오는 아주 실속있는 횟집입니다. 태평양 횟집으로 구산항 바로 앞에 있지요.
▲아이구~~ 울진의 향토말로는 놀래기 입니다. 옛날 제가 바다에 낚시가면 수도 없이 잡혀던 놀래기.
요즘은 고급회로 가격이 좀 비싸죠? 순 자연산 입니다. 수족관이 대도시와 비교할데 없이 순향토적이네요.
▲ 마을의 작은 슈퍼
▲노인정입니다. 여름에 여기 앉아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노인들의 쉼터가 되겠죠.
▲구산항 주변에서 어부들이 그물을 손질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돌아가는 이야기들과는 아주 거리가 먼 자기의 할 일. 대한민국의 국회의원들도 제발 싸우지 말고 이곳에 와서 어부들의 삶을 보고 좀 배워야할게 많은 것 같습니다. 2013년 한 해동안 싸움하다 세월만 보낸 국회의원들.
묵묵히 제 할일을 하는 어부들의 모습에서 뭔가 깨우쳐야 할듯. 그리고 사소한 일까지 협력하는 모습을~~!
▲마을 앞의 풍경입니다.
▲ 마을 앞의 풍경인데요. 왼쪽 간판이 역사적인 대풍헌의 간판입니다.
▲ 대풍헌은 울진 기성면 구산리에 마을 민가들 숲에 조그맣게 숨쉬고 있습니다.
▲입구로 들어가 봅니다. 일전에 몇 번 방문을 했었습니다. 겨울에는 어떤 모습일까 한 번 둘러봅니다.
▲ 대풍헌의 정면 모습입니다.
대풍헌의 자료를 한 번 찾아봤습니다. 아래의 자료들은 디지털 울진문화대전 http://uljin.grandculture.net/ 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대풍헌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구산리 에 있는 조선시대에 구산포(丘山浦)에서 울릉도로 가던 수토사(搜討使)들이 순풍(順風)을 기다리며 머물렀던 장소.
건물의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구산동사중수기(邱山洞舍重修記)」에 의하면 1851년(철종 2)에 중수하였고, ‘대풍헌’이란 현판을 걸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동해안 해변의 작은 포구 기성면 구산리 마을의 중심부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일자형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어칸에 2통칸의 대청을 두었고, 왼쪽에는 부엌과 제기고, 오른쪽에는 통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이전에는 오른쪽 온돌방 앞면에 난간을 두른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창호는 건물의 앞면 4칸에 알루미늄 세시의 두 짝 미서기문을 설치하였고, 대청의 좌우측에는 쌍여닫이문과 네 짝 미서기 이분합문을 달았는데, 이들 대부분이 근래에 교체된 것이다.
구조는 시멘트 모르타르로 마감한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았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앞면에만 원기둥을 설치하였고, 배면과 왼쪽에는 네모기둥을 설치하였다. 구조부는 출목 없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두를 끼워 초익공을 꾸몄고, 익공 위의 보머리에는 수서, 창방과 도리 사리에는 소로를 끼워 장식하였다. 상부 구조는 2고주 5량가로 대들보 위에 포대공을 세웠고, 뜬장혀와 종도리 사이에는 화반을 두어 장식하는 등 격식을 갖추었다. 단청은 모로 단청을 하였으나 조잡하다.
대풍헌의 건물은 평면 구성이나 일부 가구 수법에서 특색을 보이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건물의 여러 부분이 개조, 변형되었으며, 부재 치수, 결구 수법 등이 다소 조잡하지만 조선시대 울릉도를 관리하던 수토사들의 출발지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문화재의 화재를 위해 이렇게 소화전도 설치되어 있습니다.
▲대풍헌에 관한 안내도 입니다. 클릭후 확대하셔서 한 번 읽어보시면 되겠습니다.
▲대풍헌의 측면에서 본 모습입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옛날 울릉도에 다니던 선인들을 눈에 한 번 그려봅니다.
▲ 천정을 한 번 보았는데요. 오~~~ 용이 문어는 잡아먹는 그림이 있는데 무슨 뜻이 있겠지요.
▲주춧돌을 내려다 보았는데 아이구~~ 돌이 아주 크고 오래되었네요.
▲벽을 한 번 봅니다. 중건기입니다. 중건할때 후원하신 분들의 이름과 금액이 주~~루~~룩 나열되어 있네요.
이때도 역시 주민들의 협동심이 대단했네요. 연도는 단기로 표기되어 있네요.
▲집에 와서 옥편 놓고 한 번 해석해보고 싶은데요.
▲안에서 바다쪽으로 보면서
▲구산리 어촌체험마을 입니다.
울진군에도 몇 개의 어촌체험마을이 있습니다.
울진군 북면의 나곡1리어촌체험마을 , 울진 기성어촌체험마을, 구산마을, 울진군 평해 거일1리마을.
이렇게 4개가 있는데 활용도는 좀 미미합니다.
대한민국의 어촌체험마을이 원래의 취지대로 잘 운영이 되는지는 모두 확인을 못했지만 울진군의 경우로 봐서는 그렇게 원래의 취지대로100% 활동을 잘 못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전국의 어촌체험마을을 둘러보시려면 http://www.seantour.com
여기로 가시면 되구요. 홈페이지를 전체를 통일해서 만들었는데 디자인과 기획등은 별성의 없이 짜진듯한 느낌입니다.
▲항구로 나가봅니다. 모습은 좋은데 파도에 의해 항구의 수심이 자꾸 얕아지는게 안타깝습니다.
▲ 구산해수욕장을 조금 지나 평해 월송정 방향으로 가다보면 이곳이 나오는데 오른쪽이 바로 [운암서원]입니다.
▲운암서원 앞으로는 2013년 연말에 도로포장을 잘 해두었답니다.
▲운암서원의 정면/ 자료는 물론 울진문화대전에서 참고했습니다.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구산리 에 있는 조선 후기 서원.
운암서원(雲巖書院)은 1826년(순조 26)에 기성면 노은동(魯隱洞)에 건립되어 김제(金濟), 손순효(孫舜孝)를 봉안하였으나 1868년(고종 5)에 철폐되었다. 1964년에는 서원 유생들의 주창으로 구인리(邱仁里)에 이건하였다. 1995년 10월에 서원의 보수와 평삼문 개축이 이루어지고 담장을 설치하였다.
현재 운암서원 내에는 평삼문·강당·사당이 일직선상으로 배치되어 있고, 사당 옆에는 비각이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지붕은 골기와로 팔작지붕을 이었다. 평면은 중당협실형으로 앞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지붕은 골기와로 맞배지붕을 이었다.
▲운암서원의 정면
▲운암서원에 대한 안내도/ 클릭하시면 큰 사진이 뜹니다.
▲문이 잠겨서 담장 넘어 서원의 모습을 한 번 봅니다.
▲잘 단장이 되어 있습니다. 한 여름에는 여기서 조용하게 책을 좀 읽었으면 좋겠는데요. 앞이 해수욕장이라서 좀 시끄럽겠죠?
▲옛 선인들이 꼭 걸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운암서원에서 조금 지나면 길 옆에 평해 북천교비가 있습니다. 차를 타고가도 별로 눈에 띄지 않지만 차를 세워 한 번 둘러보는 것도 괜찮겠죠?
▲자료를 한 번 남겨봅니다. 물론 울진디지털 문화대전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정의]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구산리에 세워진 평해 지역 북천교 건립기념비.
1603년(선조 36) 3월에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북쪽 월송리 지역에 주민의 생활 편의를 위하여 돌다리를 세웠다. 다리 건립 공사가 끝난 후 평해북천교비를 세우게 된 경위와 건립시기를 기록하고 있다.
평해북천교비에 보이는 평해군수 조인징(趙仁徵)은 『울진읍지』에 의하면, 1599년(선조 32) 2월에 도임하여 1603년(선조 36) 3월 청원부사로 이배(移拜)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평해북천교비는 조인징이 평해 지역을 떠나기 직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건립경위]
조선 중기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북쪽 월송리 지역에 하나의 사천(沙川)이 바닷물과 서로 통해 사시(四時)로 물이 넘쳐 지역 주민들이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당하고, 울진 지역을 찾는 상인들이 통행에 많은 곤란을 겪어 왔다. 이에 지역 주민의 불편함을 개선하고자 당시 평해군수였던 조인징의 허락을 얻어 돌다리를 세우게 되었으며, 이를 기념하여 평해북천교비를 세웠다.
[위치]
평해북천교비는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구산리 366-5번지에 있다.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와 인접하여 있으며, 국도 7호선 옆에 자리하고 있다. 인근에는 운암서원과 기성초등학교 구산분교장이 있으며, 관광지로 구산해수욕장이 있다.
자갈이 듬성듬성 박힌 사암으로 제작한 월두형 비석으로 평해북천교비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비각 내에 있으며, 높이가 187㎝에 너비가 64㎝이다.
평해북천교비 앞면에 공대주(供大主) 김홍수(金洪水)와 석수(石手) 황종이(黃從伊), 응상(應上) 등 대시주(大施主) 71인의 원명과 추명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뒷면에는 앞면에 이어 황언정(黃彦仃) 등 대시주 20인의 이름과 승려로 이해되는 역오(亦悟) 등 3인의 공양주(供養主)와 태인(太仁) 등 2인의 별좌(別坐), 화주(化主) 홍신(洪信)의 이름 등을 새겨 넣었다.
비문의 내용으로는 평해군 북쪽 10리 월송림 가에 모랫바닥의 하천이 있어 바닷물과 서로 통해 사시(四時)로 물이 넘쳐 모든 일상생활과 상인들의 통행이 어려웠다. 공사생활(公私生活)에 불편이 없도록 갖추고자 군수 조인징이 고을 사람들과 의논하여 돌로 다리를 이룩하여 놓으니 모든 왕래에 막힘이 없게 되었다. 공사비 부담 등 공사에 참가한 자들을 이 돌에 새겨둔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황]
평해북천교비에 새겨진 사람들의 이름은 당시의 발음대로 기록한 점이 특이하다. 글씨는 해서체이나 간혹 초서를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오늘날 자전에서 찾을 수 없는 글자도 간혹 있다. 2004년 10월 14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61호로 지정되었다.
▲비문이 너무나 오래되어 읽을수가 없네요.410여년전의 금석문입니다.
▲ 금석문의 정면
▲ 문화재를 아끼고 사랑합시다. 라는 문구를 보니 양심이 좀 찌~~~르~~르 하네요.
사실은 바람에 넘어져 있던 작은 안내판을 세워두었답니다.
▲해수욕장에 잠시 들려봤습니다. 송창식씨의 ' 철지난 바닷가' 노래가 생각납니다.
♬ 철지~이 난 바닷가를 ...................................1970년대에 참 많이도 불렀었죠.
▲소나무가 잘 자라고 있습니다. 한 여름철에는 여기에 텐트를 많이 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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